석진국 거제공증사무소 변호사
석진국 거제공증사무소 변호사

1988년 마산에서 변호사 업무를 시작한 후 창원·밀양·김해를 거쳐 2010년에 거제로 와서 공증사무소를 연지 12년이 흘렀다. 그동안 거제의 형편도 많이 바꼈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잘나가던 동네였는데 조선경기가 가라앉으면서 반동가리가 나고 코로나가 오니 다시 반쪽이 됐다. 이제 조선업도 살아나고 코로나도 서서히 막을 내린다고 하니 반등의 조짐은 보인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환갑·진갑 다 지나서 친구들은 거의 은퇴를 했으니 나도 슬슬 생의 마지막을 보낼 장소를 물색해야겠다. 그렇게 시골지역을 찾아 돌아다니던 중에 함양군 병곡면에 이르렀다. 함양·산청하면 지리산 자락이라서 교통이 불편한 오지중의 오지로 통했지만, 이제 통영~대전 고속도로와 88고속도로가 변신한 대구~광주간 고속도로가 지나는 분기점이니 교통의 요지가 됐다. 서남쪽의 전라도 광주나 서북쪽의 전주, 북동의 대구, 남쪽의 진주·통영과 한 시간 거리이니 얼마나 교통이 좋은 곳인가? 정말 격세지감이 든다.

거기서 우연히 얻은 죽염은 치주염에 특효약이었다. 신기하게도 차를 타고 오면서 몇알 녹여 먹었는데 거제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입속이 편안해졌다. 전부터 죽염이 좋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리 와닿지를 않았었는데 몸으로 체험하니 어찌 감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죽염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단군시대부터 존재하던 비방이라는 설과 변산의 진표율사가 전수해준 불가의 비법이라는 말도 있지만, 죽염 제조법을 제대로 정립해 보급한 것은 인산(仁山) 김일훈(金一勳·1909∼1992)이다. 죽염은 1980년대 중반부터 점차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하면서 산업적인 생산이 시작됐고, 관련 제품 및 관련 기술특허와 연구 성과물도 증가했다.

한쪽이 막힌 대나무통에 천일염을 채우고 황토로 봉한 뒤 가마에 넣고 소나무 장작으로 불을 지펴 구우면 대나무진이 천일염에 녹아 엉겨 굳으면서 소금 덩어리가 된다. 이 덩어리를 빻아 다시 대나무통에 넣고 장작불에 8번 반복해 굽는다. 마지막 9번째 구울 때는 송진을 뿌려 1200도 이상 고열로 가열하면 소금이 녹는데, 이것이 식어서 굳으면 분쇄해 사용한다.

김일훈은 1909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으나 탈옥한 뒤 광복 직전까지 전국의 산지를 다니며 약초를 연구했고, 병명도 모른 채 죽어가는 사람들을 대가 없이 살려내 신의(神醫)로 불렸다. 해방 후에는 정치활동을 하다가 1952년 은퇴하고 함양군으로 내려가 약초연구와 진료 활동에 전념하다가 타계하기까지 돈 받지 않고 환자를 치료해 '가난한 민초들의 의왕'으로 존경받았다.

죽염의 효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도 있다. 소금을 적게 먹어야 된다는 것이 다수이지만 소금이 또 꼭 필요하다는 사람도 있다. 9번 구우나 10번을 구우나 소금은 소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죽염에 대한 정확한 과학적 근거는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입 속이 편안해진지 벌써 3주째고 아무 탈이 없으니 죽염의 효능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학적 탐구는 후세 사람들의 연구에 맡겨둔다.

김일훈이 살면서 죽염과 약초를 연구한 함양은 또한 고운 최치원이 당시 함양태수로 있으면서 홍수를 막기 위해 조성했다는 상림(숲)으로 유명하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많고 하늘에 잔별이 많듯이 신병도 많지만 또한 좋은 사람도 많고 걸맞은 약도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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