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김계수 칼럼위원

도저히 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마른 가시덤불에도 봄이 돋아나고 겨우내 앙상했던 산딸기 가지에도 흰 꽃은 피어나는데 나의 봄은 또 어물쩍 지나가려 한다.

4월 여전히 이름 없는 것들도 마구 피어나서 꽃으로 살아가는데 잊어진 이름 하나 생각나지 않는 빈 사랑의 계절, 봄이 또 어물쩍 지나가려 한다. 이럴 수는 없다 싶어, 내 봄을 허무하게 뺏길 수 없다 싶어 독봉산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꽃 피었다고 모여든 사람들보다 각자의 전화기가 더 바쁘다. 벚꽃 아래 지나는 나이 드신 여인들이 ‘하아! 저 봐라! 저 꽃 봐라!’ 꽃 보며 뭐라 하시는데 아주 오래도록 건강하게 ‘저 봐라, 저 꽃 봐라~’ 하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처럼 생활에 떠밀려 어물쩍 봄을 넘겨버린 날들이 저 나이 드신 누님들에게는 이제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데, 여자들의 엉성한 목덜미에 얹어진 흰머리가 이미 꽃이다 싶다.

공원 곳곳에 튤립이며, 아네모네, 라넌플라스, 무스카리, 칼스베드, 이름 복잡한 국화 같은 꽃들이 색 다양하게 단장을 참 잘했다. 4월의 꽃이 일어나는 곳으로 4월의 잎이 알려주는 곳으로 발걸음과 눈걸음이 자연스럽게 놓여진다.

그런데 진작 4월은 꽃도 꽃이려니와 멀리 보이는 봄 산에 번져가는 어린 연두 잎 보는 감흥도 크다. 마치 봄 산은 어머니가 따사로운 햇볕에 슬쩍 넣어 데쳐놓은 산나물 같다. 톳이나 몰 같은 갈색 해초도 데쳐놓으면 어찌 그리 선명한 연두색으로 변하는지 어찌 어머니는 그 시절 저리 고운 연두색을 밥상마다 선명하게 펼쳐 놓으셨을까. 산이며 들이며 계곡이며 입맛 따라 봄을 데쳐서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두를 뿜어내는 산길에 어머니 발걸음 오며가며 자식처럼 가벼웠으리라.

나무마다 슬슬 데치고 남은 물은 산 아래로 흘러들어 파란 깊이를 모으고 있다. 먹이질 하는 왜가리의 부럽턴 발이 파랗게 물이 들것 같다. 온 산이 어머니가 데쳐 놓은 산나물 같은 부드럽고 고운 봄으로 따뜻하게 놓였다.

산에서 피어난 꽃이며 잎, 새들까지 고현천으로 모여들어 이미 봄으로 가득하다. 가득 드러누운 봄을 깨우는 아이의 돌팔매질마저 가볍다. 어느 꽃에 닿았던 바람인지, 어느 연록의 잎에 머물렀던 바람인지 높이와 부피를 함부로 가늠할 수 없는 기운이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아, 이런 날은 4월의 잎으로 드러누워 하늘을 보고 싶다. 지금의 4월은 20년이나 30년 전쯤에는 아카시아 꽃 날리는 5월의 날씨다. 그 때 내 청춘은 꽃이나 향기보다 앞서 걸었지만 지금은 늘 향기가 나보다 두어 걸음 앞서 달아나고 봄마저 쏜살같이 먼저 앞서 사라진다.

오늘은 20년이나 30년 전쯤의 봄을 소환하여 4월의 잎으로 누워 하늘만 바라보고 싶다. 잎으로 누워서 나도 저 나이든 여인들처럼 ‘이야, 저 봐라! 저 꽃 봐라, 저 잎들 좀 봐라!’ 소리하고 싶다. 그러다가 지난 인연 하나 둘 불러 모아 ‘오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를 목청껏 부르며 나도 봄 산처럼 고운 햇살에 살짝 데쳐져도 좋으리.

TV뉴스와 인터넷에서 마구 제공되는 세상 소식들을 멀리한 지 한 달이 지났다. 하루라도 확인하지 않으면 큰 일 날 것 같았던 세상 소식에 무덤덤해도 꽃은 피고 봄은 곧 지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내일 사라질 꽃잎들을 위하여 단 하루를 남겨두기로 하자. 내일 떠날지도 모를 사람들을 위하여 4월 어느 하루쯤은 잎으로 누워 하늘을 보자. 목련나무 그늘 아래서 읽을 편지 한 장 받아 볼 일 없는 외톨이라 하더라도 한 번도 위독해지지 않은 사랑처럼, 한 번도 불편해 본 적 없는 인생인 것처럼 봄으로 누워보자.

세상에는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랑의 이름 따위는 없는 것, 누구든지 봄의 색깔 앞에서는 하루를 버려서 봄이 되어 보는 것이지. 세상 근심 따위 버리고 잠시 청춘인 척 하는데 멀리 간 애인에게서 문자가 온다.

‘남자의 가슴에도 봄이 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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