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영미 수필가
추영미 수필가

가슴 설레던 시절이었다. 새내기로 대학생활을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대와 호기심으로 행복했다. 매일 버스로 등교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창밖의 풍경들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웠다. 봄바람에 하롱하롱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벚꽃 잎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나른해져 졸다 깨어보면 어느새 학교 앞이었다.

학교의 규모나 환경을 본다면 부족하고 불편한 것뿐이었지만, 입시에 벗어났다는 해방감으로 마냥 즐겁기만 했다. 조선소의 한쪽 귀퉁이에 위치한 학교는 여느 대학캠퍼스와는 너무나 다른 환경이었다. 캠퍼스라고 불릴만한 공간이 없다보니 낭만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 참 멀었다. 잔뜩 쌓여있는 검붉은 철판들과 쇳가루가 날리는 환경 속에 감청색 작업복을 입고 출퇴근 하는 노동자들과 우리는 함께 했다.

나는 관심이 없는 과목들과는 담을 쌓은 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읽는 것으로 빛나는 나의 젊은 날들을 축내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막 사춘기를 겪는 소녀처럼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조선소의 야드를 구르는 먼지를 보고 있으면 나 또한 한 점 먼지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그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고 즐겨듣던 노래가 이윤수의 '먼지가 되어'였다.

'내 조그만 공간속에 추억만 쌓이고/까닭모를 눈물만이 아른거리네/작은 가슴 모두 모두와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바람에 날려 당신곁으로….'

전주만 들어도 가슴이 시려왔다. 가사 한마디 한마디가 단단하지 못한 내 심사를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한 허전함을 그나마 같은 과 일곱명이었던 여자친구들과의 우정을 키워가며 대학생활의 호흡을 연명하고 있었다.

학교 체육대회가 있던 날이다. 이십대의 젊음이 주는 열정과 일탈은 자유와 방종으로 이어졌다. 같은 과 친구들이 출전을 하게 되면 목이 터져라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그러다 보았다. 유난히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을 가진 그 아이가 나와 같은 과 동기생이라는 것을. 민첩한 동작으로 농구 골대를 향해 슛을 날릴 때마다 초여름 햇살에 그의 머리칼은 더욱 빛났다. 정지화면을 띄워놓은 것처럼 그의 모습은 내 눈에 박혔다. 아니 심장에 박혔다. 그 순간 내 가슴에 별 하나가 자리 잡았다.

강의실 뒷자리가 지정석이 돼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맥없던 생활이 달라졌다. 뭔가 새로운 삶의 목표가 생긴 듯 가슴이 설레며, 겨드랑에 날개하나가 돋아난 듯 매일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그 아이를 향한 마음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만 가서 나 스스로 감당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렇게 좋은데, 곧 여름방학 시작이다. 끝내 두 달 이상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시집에서 좋아하던 구절을 베끼고, 밤을 꼬박 새워 편지를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너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말까지 덧붙여가며 나의 첫 연서를 띄웠다.

하루가 여삼추였으나, 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되어서도 그 아이에게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과 후회의 마음은 늘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고 그럴수록 내 맘은 더욱 초조해져갔다. 답답한 마음에 친한 친구와 술잔을 앞에 놓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친구는 어렵게 차마 내게 말을 할 수 없었다며 그 아이가 했다는 말을 전해 줬다.

"영미가 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쟤 좀 이상한 것 같아. 뭔 말인지 모르겠어."

친구의 말에 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내 마음속에 타오르던 별 하나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리고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픈 나의 스무 살이었다.

컴퓨터의 먼지를 닦는다. 닦아도 닦아도 제자리인 양 다시 내려앉는 먼지처럼 내 그리움도 그런 것이었다. 손에 든 걸레를 내려놓는다. 이쯤 해두자. 어차피 조금 있으면 겨울햇살 아래 더욱 빛날 먼지일 테니. 어차피 빛이 있는 곳에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먼지가 아니던가. 슬쩍 눈을 감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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