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태 수필가
서용태 수필가

손주 손에 이끌려 어린이 놀이터에 왔다. 놀이기구래야 미끄럼틀·그네·시소가 전부다. 그중에서도 손주는 시소 타기를 좋아한다. 미끄럼 타기는 혼자서도 잘한다. 안전에만 신경써주면 그만이다. 그네 타기는 더 수월하다. 뒤에서 살짝 밀어주면 된다. 애들은 한 가지 놀이에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이것저것을 해보고는 마지막에 꼭 시소를 타게 된다. 반대편에 손주를 올려놓고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온몸에 땀이 흐른다. 양쪽의 중량 균형이 어느 정도 유지돼야 무리없이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인 것이다. 그러나 9㎏ 밖에 안되는 손주와 시소를 타려면 임의로 올려주고 내려주는 일을 반복하는 수고가 따른다.

보잘 것 없는 놀이지만 매료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불균형의 놀이기구를 조화롭게 즐길 수 있어서다. 양편의 중량이 일치하거나, 너무 많은 차이가 나면 서로가 불편한 놀이가 되고 만다. 그러나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상대가 그렇지 못한 상대에 대해 약간의 배려만으로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다.

손주가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일어서서 손잡이에 힘을 주어 눌러주면 되고, 내려올 때는 반대로 손잡이에 힘을 가하지 않으면 되니까.

그럼에도 손주는 나를, 나는 손주를 마주 보며 웃을 수 있어서 좋다. 마주하고 앉았기에 손주의 안전은 물론이고 즐거운지 싫증이 난 것인지 그런 표정까지도 살필 수가 있다.

이 얼마나 조화로운 놀이기구인가. 도저히 어울릴 수 없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두 사람을 한데 묶어놓고 즐길 수 있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누구나 시소를 타던 유년시절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깔깔대며 즐기던 그 놀이. 나로 인해서 동무가 허공에 떠오르고, 동무의 도움으로 땅바닥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아오르기를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어느덧 하나로 묶어지지 않았던가.

그랬다. 한번은 동무가 높이 오르고 다음은 내가 높이 오를 수 있는 쾌감이 온몸으로 전해지곤 했다. 높이 오를 기회가 고루 주어지다 보니 긴장감은 적으나 행복감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행여나 동무가 떨어져서 다치기라도 할까 싶어 '손잡이 꼭 잡아'라는 염려 섞인 말속에서 우정이 자랐다. 오로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놀이기구. 승자도 패자도 없는 놀이기구가 시소인 것이다.

손주와 시소 타기를 하는 동안 점점 깊은 상념속으로 빠져들었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가슴 속에서 무엇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어릴적 시소는 우정을 확인하는 단순한 즐길거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순(耳順)의 눈으로,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이 놀이기구야말로 우리 삶의 원리요 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단순해 보이는 놀이기구에도 깊은 뜻이 담겨있을 줄이야.

요즈음 우리 사회의 화두는 통합과 양극화 극복인 듯하다. 너무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들, 힘센 사람과 힘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농처럼 썩은 것이 자라고 있어 그 고통의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나 보다.

누가 그 아픔의 눈물을 닦아 줄 것인가. 울고 있는 사람이,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이 그 일을 맡아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누가 봐도 그것은 아닌 것이다. 저들 보다 나은 내가 그 일을 해야만 한다.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강요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통합이고 양극화의 간극을 좁혀 나가는 첫걸음이 아니겠는가.

우리 사회는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앞서가는 사람들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하여 뒤처진 사람들의 고통을 헤아릴 아량도 여유도 없었지 싶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을 깊게 하면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저들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마주 보며 서로 웃고, 배려하는 시소처럼 그런 삶이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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