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후 1664년 (현종5년) 거제도의 중심지는 고현지역에서 거제면 지역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관아를 옮긴 이후에도 옛 치소지인 고현지역에는 적잖은 백성들이 거주했고, 거제면과 고현지역의 백성들은 왕래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당시 고현지역과 거제면 지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던 고자산치(姑子山峙)가 너무 경사가 심하고 험해 백성들의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길은 현재 거제면 명진 뒷산 고개를 넘어 상문동 용산마을에 이르는 길로 선자산 골짜기를 넘기 때문에 고개가 높아 가마를 타거나 말을 타고 고개를 오르기 힘들었고 짐을 지고 다니거나 보행에도 어려웠다. 이 문제는 거제도의 중심지가 고현지역에서 거제면 지역으로 옮긴지 20여년이 지난 1668년(숙종14년)까지 계속된다.

그러자 당시 거제현령으로 부임한 김대기(金大器)는 고현동 거제공설운동장에서 계룡산 중허리 북서쪽으로 가로질러 열마지기골짜기(거제뷰골프장)를 지나 거제면 화원(花垣)마을로 통하는 길이 8㎞·폭 3m의 신작로(新作路)를 만드는 대공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흉년이 들어 어려울 때 백성을 동원해 길을 닦아 백성의 원성도 적잖은데다 당시 괴질로 많은 사람이 죽게 되자 도로 개설을 중단하게 했다.

그러나 김대기는 공사를 이어갔고 조정은 명령을 어긴 그를 파직하고 일운면 망치로 귀양 보냈다. 김대기는 1688년 3월18일에 거제현령으로 임명됐다가 같은해 10월27일에 파직됐다.

김대기 현감이 만든 신작로는 이후 현대까지 많은 백성들이 편리하게 사용했고, 1930년 그의 후손인 김계윤(金季潤)이 서문고개 장평과의 교차지점에 비석을 세우게 되는데 이 비석이 '김현령치비(金縣令峙碑)'다.

김대기 현감이 당시 만든 신작로는 '김현령치', 또는 거제도 사투리로 '김실령재'라고 불렸다.

몇년 전 국도14호선 우회도로 개설로 인해 김실령치의 장평동 구간이 많이 사라졌고 이때 거제종합운동장 보조구장 인근에 옛 비석과 새로운 비를 세웠다.

지금도 거제지역에는 김대기 현령이 귀양갔다는 일운면 망치마을을 비롯해 후손인 의성김씨(義城金氏)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운면 망치는 김대기 현감이 파직 후 뒷산 고개에서 넒은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기 때문에 붙은 지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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