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이북5도민 거제시연합회 이장영 회장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는 백발의 노인은 눈시울이 잠시 붉어진다. 컴퓨터 화면을 가리킨 곳은 북한 땅 함경남도 함흥시 낙민리(신창리)였다.

"여긴 내가 놀던 냇가고, 여기가 우리가 운영하던 젖소 목장이에요. 지금은 건물이 많이도 들어섰네요. 우린 남겨진 가족도 없는데 이젠 갈 수 없는 곳이라 더 그리운 것 같아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71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사라지고 기억의 왜곡까지 더해지고 있다. 지난 21일 이장영(81) 전 이북5도민(함경남북도·평안남북도·황해도)거제시연합회 회장을 만나 70년 전 그의 기록의 조각을 함께 맞춰보는 시간을 가졌다.

거제신문이 1년만에 그를 다시 만난 까닭은 최근 몇년 사이 흥남철수작전과 거제도 피난민의 이야기가 회자될 때마다 빠지지 않은 '1950년 크리스마스의 기적' 스토리텔링의 기억에 대한 견해 때문이다.

그를 비롯한 거제 지역민의 기억에선 1950년 장승포항의 크리스마스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없었다.

상륙함 LST US 914호에 오르다

이 회장의 기억은 흥남철수작전을 다룬 다양한 기사와 다큐멘터리 등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유서 깊은 기독교(캐나다 선교회)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인민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할아버지는 교회 조사(助師)로 근무하셨고 아버지는 남쪽으로 피난 가기 전까지 거의 반년 동안 집안에서 운영하던 목장에서 땅굴을 파고 인민군 입대를 피해 숨어 있었다.

1950년 10월19일, 그는 한국군의 진격을 목격하면서 전세가 뒤바뀐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하지만 2달도 되지 않아 전세는 또다시 바뀌게 된다.

당시 이 회장의 목장 옆 향교는 미군들이 시체 보관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시체를 나르는 횟수가 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그리고 옆집 살던 현봉학 박사와 현영학 박사는 그의 가족에게 피난을 권유했다.

이 회장의 집안은 공산당의 지배체제에서 살아가기 힘든 종교인 탓도 있지만, 그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해 수차례 옥살이를 했던 탓이라 북한군이 눈밖에 날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현 박사의 우려처럼 당시 33살의 혈기 왕성했던 그의 부친은 '이 많은 사람들을 두고 어디를 간단 말이냐'며 피난을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 박사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불리해진 전세를 우려해 종교인 등 피난민과 지식인 등 4000여명의 명단에 이 회장 집안 사람을 포함시켰다.

그의 가족은 12월19일 함흥을 출발해  12월22일 오후 9시 흥남에서 배를 타고 피난길에 올랐다. 배에 올라서자 부두 뒤 산등성이 너머는 포격과 교전으로 인한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는데 아직도 그렇게 화려한 불꽃은 본 적이 없단다.

그해 겨울 유난히 추웠던 흥남의 얼어붙은 항구에 수십만의 피난민들이 말 그대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며 아비규환인 상태였다.

지난 2019년 영국 해군인 조카사위가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당시 시간과 경유지 등을 탐문해 알아낸 사실이지만 그가 탔던 피난선은 'LST US 914'라는 이름의 미군 상륙함이었다.

그의 가족을 태운 배는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 본 산(山)만한 파도가 굽이치는 동해를 건너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12월27일까지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오지 않았다

이 회장이 최종 목적지인 거제에 도착한 시간은 크리스마스 날인 25일 아침이었다. 전날인 24일 부산 오륙도에 한참이나 정박하다 거제도에 도착하기 꼬박 3박4일이나 걸린 것이다.

그가 탄 배는 장승포 1구에 정박했고 당시 배에서 내린 피난민들은 곧바로 현재 장승포초등학교에 마련된 임시거처로 향했다. 그는 장승포초등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부녀자들이 나눠준 차가운 주먹밥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이 회장은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크리스마스 이전에 거제에 도착했다는 주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가 도착한 25일 아침부터 거제면의 피난민 거처로 떠나는 27일까지 3일간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 이 회장의 기억에 오류가 있더라도 12명이나 되는, 그것도 유서 깊은 기독교 집안이었던 그의 가족 모두가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보지 못한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어 보인다.

이 회장은 수년전 한 인터뷰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거제에 왔다는 피난민중 27일 닿았다는 인터뷰를 한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그 주장에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

그는 1950년 12월27일 오후 새로운 보금자리인 거제면 옥산성 밑 동산으로 이동하고 마전동 언덕을 지나 옥림마을의 아름다운 솔밭길을 지난 기억에서도 메러디스 빅토리호 규모의 배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요즘 그는 구글 어스 지도를 보는 일이 많다고 한다. 언젠가 고향에 돌아간다면 70년 전 함흥에서 흥남부두로 걸어왔던 길을 꼭 한번 되돌아 가보고 싶어서란다.

이 회장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너무도 애절한데 남기고 온 일가친척이 없어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라면서 "새로운 기회의 땅이 되고 내 가족을 이룬 제2의 고향 거제에 대한 애정이야 당연하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여전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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