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효촌마을'로 불리는 지명은 모두 37곳으로 대부분 효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갖고 있지만 역사에 기록된 사례는 드물다.

하지만 거제의 효자 이돌대는 경상도 안찰사가 임금에게 보고할 정도로 그 효심이 지극했다.

'중종실록 제30권'에는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안국(金安國)이 장계(狀啓)를 올려 "거제(巨濟)의 염한(鹽漢·소금을 만드는 사람) 이돌대(李乭大)는 일곱 살에 아비를 잃었는데, 지극한 효성으로 어미를 봉양해 달마다 세 번 음식을 풍성히 장만하고 잔치를 베풀어 어미에게 바쳤다. 어미가 죽어서는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되 조석으로 제전(祭奠)을 아주 깨끗이 하는데 힘썼으며, 가난해 어머니의 묘에 제사음식을 바치는 일을 계속할 수 없으면 때로는 빌어다가 제사하는 등 조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고, 흙을 져다가 무덤을 만들되 남보다 특이하게 하고 돌을 가져다 담을 쌓되 높이 석 자나 되게 했다. 상기(喪期)를 마치고 나서는 어미의 무덤 곁에 아비를 옮겨 묻고서, 명일(名日)과 기일(忌日)에 지성으로 제사하고, 매월 그믐날에 무덤에서 별제(別祭)하되, 제사 때마다 반드시 하루 전에 무덤 있는 곳에 올라가 심신을 깨끗이 하고 제사에만 매진했으며(致齋), 무덤에 물을 뿌리고 비로 쓰는 일(灑掃)과 잡초를 제거했다"고 했다.

이후 이돌대의 효심은 150여년이 지난 숙종(1674년~1720년)에서야 하청면 사환리에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지면서 만인에게 칭송 받게 된다.

효자장사랑전주이공돌대유적비(孝子將仕郞全州李公乭大遺蹟碑)다. 이 비석은 조선 숙종 때 하청면 사환리에 처음 세워져 순조 5년(1805년)에 봉산재(송정고개)로 옮겼고, 1991년 7월 국도 확장공사로 인해 옥포 어린이놀이터로 이전했다.

그러다 2001년 8월부터 효촌마을 주민들의 숙원사업으로 추진돼 2006년 1월 연초면 효촌마을 입구에서 제막식을 열고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

가난했지만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하나만큼은 조선 최고였던 거제의 효자 이돌대의 지극한 효성은 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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