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곤 거제제일교회 목사
김형곤 거제제일교회 목사

초록빛이 반짝이는 나무이파리들이 계절 여행을 준비하듯 가을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오곡이 무르익어 결실을 맺는 계절, 봄부터 수고한 농부의 가슴에 기쁨을 안겨주는 가을을 기다린다. 그래서 요즘 노래를 부른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입고서…' 가을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러나 가을을 기다린 절박한 이유가 있다. 가을에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듯 바람이 불때마다 흩날리는 낙엽의 운치나 가을 햇살을 담뿍 머금은 먹거리의 깊음과 성숙을 맛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고 싶기에 기다렸다.

폭염이 쏱아지는 여름 가운데 잠을 이루지 못한 불면의 여러 날을 밤새도록 몸으로 받아내었던 고통이 있었기에 시원한 계절이 오면 지친 나를 위로해 줄 것 같은 바램으로 가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기다림은 기다릴 수밖에 없을 때 존재한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낀다. 내 힘과 능력 그리고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그저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둘 수밖에 없을 때가 바로 기다림의 순간이다. 지금처럼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단계가 적용된지 오래 되었다.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이 불편함이 해소되기를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사람은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특히 생활고와 직접 연결된 많은 소상공인들과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그 결과 성급하게 행동하기도 하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게 된다. 혹은 자기 자신과 생활 주변에 부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채우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기다림만도 힘든데 또 다른 문제의 씨앗이 심어지게 된다. 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삶 중의 하나는 기다림이다. 신앙인의 삶은 다시 오실 예수님의 큰 위로를 받을 날을 기다리며 사는 삶이다. 그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는 것을 믿고 있다.

때로 고난도 당하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숙을 위한 진통이며, 때로 병도 들지만 그것도 더 깊은 영성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기에 끈질기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며 늦어져도 실망하거나 나태해지지 않는 삶이다.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조급병이다. 사람들은 서서히 성장하는 것보다 급성장을 좋아한다. 그러나 결코 한순간에 이룰 수 없는 것이 있다. 밀가루 반죽을 해서 바로 빵을 만들면 부드럽지 않고 딱딱해서 못 먹으며 밭에서 방금 캔 감자는 바로 먹기에는 너무 독하며 포도도, 빵도, 감자도 하루 정도 숙성을 시켜야 제맛이 나는 것처럼 결정도 하루 정도 가라앉혀야 본래의 정체가 드러난다.

성서를 보면 하나님은 귀히 쓰시길 원하는 사람마다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여 철저하게 훈련하셨다. 요셉을 정금 같이 쓰시기 위해 13년 동안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경험하게 했고, 모세를 훈련시키기 위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했으며, 여호수아를 쓰시기 위해 모세의 시종으로 40년을 기다리게 했다. 귀하게 쓰시기로 작정할수록 많은 준비를 시키셨다.
 

어떤 버섯은 6시간이면 자라고 호박은 6개월이면 자라지만 참나무는 6년이 걸리고 건실한 참나무로 자태를 드러내려면 100년이 걸린다. 설렁탕에 사용할 진국을 울궈내기 위하여 8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 우리의 거품과 세속적인 기름기는 기다림으로만 진국 되어질 수 있다.

태아는 세상의 빛을 보기 위해 10달을 엄마 뱃속에서 기다린다. 학생은 대학입시를 위해 공부하면서 12년을 기다리고, 군에서 제대날짜를 기다리는 군인, 해외에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 4년을 기다리는 운동선수. 분단된 우리에게는 통일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모두 저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무엇인가를 기다림이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 기다림 속에서 '삶'은 진행되고, 기다림 속에서 인도되고, 기다림 속에서 성취되어 감을 보게 된다.

기다릴 수 있음을 신앙적 표현한다면 영력이라 할 수 있지만 보편적 표현은 인내의 실력이라 할 수 있다. 기다리는 자체가 이미 절반은 승리한 것이다. 기다림의 뿌리는 신뢰이다. 재난지원금을 받아야 할 만큼 이 어려운 때에도 나라와 민족,  우리 사회가 다시 회복될 수 있음을 신뢰할 때 끝까지 기다릴 수 있다.

우리의 기대도, 경제의 성장도, 사람의 변화도, 문제의 해결도 조바심을 몰아내고 기다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 어려운 때 서로가 한마음임을 알고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줄 수 있다면 웃을 수 있는 날이 분명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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