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 박수근

어린시절 나의 놀이터는 골목길이었다. 돌담으로 이어지는 좁디좁은 작은 골목은 봄·여름·가을·겨울의  변화를 다 느끼게 해줬다.

앞집 금순이네 집 마당의 소담한 꽃밭에 파릇한 풀밭사이로 꽃봉오리가 올라오면 봄날의 시작이고, 윗집 마당에 무화과가 익어가면 여름의 시작이며, 빨간 과실 석류가 살포시 입을 벌려 영롱한 속살을 보이면 가을이었으며, 겨울의 골목길은 초가지붕 다시 이는 작업으로 언제나 짚풀들로 어지러웠다.

그것들은 골목길에 이어져 항상 열려 있던 대문을 프레임으로 한 폭의 그림 같이 펼쳐져 있었다. 어느 집 대문도 닫혀져 있거나 잠겨 있지 않았기에 어린 시절 우리는 앞집·뒷집·옆집으로 숨바꼭질 놀이로 숨어들고 대장놀이로 뛰어들기도 했다.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사랑받고 있는 박수근 화백의 그림 중 내가 '골목길'이라는 작품을 유독 좋아하는 이유도 이런 나의 유년시절과 무관하지 않다.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밀레의 그림에서 감명을 받아 화가의 꿈을 키웠다는 그는 가방끈이 짧은 화가였다. 대단하고 서사적인 예술관 보다는 소담하고 평범한 작업관을 가진 박수근은 독학으로 자신만의 그림을 그렸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시절 미군병들을 위해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생활했지만 그의 작업은 부단했고 미학적으로도 깊이를 더해 갔다. 단순한 선묘의 유려함과 마티에르에 녹아 있는 중의적 표상은 당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가장 한국적인 화가의 반열에 머무른다.

2016년 한 해가 저물었다. 시간이 흘러 먼 미래에 우리는 이 시간들을 어떻게 기억할까? 평범한 사람들의 힘과 열망이 큰 흐름을 만드는 근현대사를 통해 학습된 것은 나라는 존재의 소중함이다. 골목 안에서 마음껏 뛰어놀던 어린 시절처럼 집들과 집들, 사람과 사람들 사이로 이어져 있는 유대감이 살아나는 세상을 새해에는 기대한다.

글 = 권용복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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