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석 칼럼위원

▲ 김한석 전 거제문인협회장
용서는 못할 것도 없고 안 하는 것도 없다. 누구나 용서에 매달려 살지는 않는다. 그 순간에 자기의 삶이 이어질 뿐이다. 폭력이 있으면 이에 따른 습관성 마니아가 있고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직업까지 준비돼 있다. 어차피 폭력에 대처한 사회적 제도로 굳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한 눈 팔기가 어려운 세상에 자기의 할 일에 전력투구해 나아가는 것이다. 용서에 관계된 일이라면 용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 끈임 없이 자성하고 순백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이렇지 않고 북한의 도발처럼 폭력을 일삼는다면 스스로 망가진 얼굴이 될 뿐이다. 하물며 이러한 인상이 뭐 좋아서 우리들은 닮지도 않거니와 털끝만큼도 구애(拘碍) 받을 일이 있겠는가?

생업과 생계와 인간의 본업이 생명력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보다 철저한 빛을 향한 동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일에 눈을 뜨지 않고서는 좋은 인상 좋은 삶이 찾아올 리 없다. 굶주려서 아사상태의 집단의 저항적 폭동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로 납득이 간다.

하지만 이념만 앞세운 배부른 지식집단의 타성과 패권적 권위를 위하여 투쟁하는 모습은 옳지 않다. 바른 삶의 진원지가 되는 빛을 향한 삶의 진실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마음먹기 따라서는 저 지옥까지 스스로를 끌고 갈수가 있다. 마음먹은 대로 극좌 극우 또는 꿈과 희망 그리고 맹서가 꼭 그렇게 실현되는 것이 마음의 법칙이라면 이러한 법칙의 공유자산은 반성과 참회다.

북한은 이러한 일을 아직 안하고 있다. 6.25 전쟁의 직접적 원인, 판문점 휴전병사(兵舍)의 도끼만행. 천안함 피격 폭침. 목함지뢰 매설 등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올 1월6일에는 제5차 핵실험 도발을 감행해 남한지역 일대와 부산항을 정조준 한 방사포 미사일 시물레이션 빔을 얼굴에 둘러쓰고 나섰다.

또 지난 8월3일에는 노동미사일을 일본의 배타적 경제수역(EEZ)내에 발사하여 세계를 위협하고 긴장시킴으로써 폭력행위와 그 언어만 마음에 담고 있는듯하다. 반성과 사과의 여지가 없는 상태는 더욱 용서의 순리에 다가설 리가 없다. 우리들은 결코 이간질의 후견인이 되거나 결속을 저버린 자해를 불러들여서는 안 된다.

지구환경의 정화와 나아가서 우주본심의 믿음은 우리들 스스로의 자구적 노력이 가일층 강화될 때 가능하다. 스스로를 순화된 인격체로 다스리지 못하는 핵은 결코 우리들을 보호하는 우산이 되거나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승기(勝氣)의 기량을 펴지 않은 채 국력을 잃을 수는 없다. 여기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당략과 정책이 소아적 의구심으로 대승적 단결력을 저버릴 수는 없다. 자강 자구적 노력의 꾸준한 실천은 더욱 중요하다. 왜 우리들에게는 핵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대응적 핵은 얼마든지 이미 우리들의 일상에 스며있다. 방어적 기술은 우리들의 생명산업의 기저에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늦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들의 우주항공 관련 미사일(로켓) 산업은 20년 이상이나 오랜 시간 추진해왔다. 온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시급한 일을 더욱 가속화시켜야 한다. 온전한 시작과 통일된 향일성이 신념과 믿음 이상으로 우리들은 가능과 능력을 실천하는데 희생봉사 해야 한다. 그렇다면 소모적인 파벌을 내세우지 말고 공익을 호도한 사심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자기의 잘못을 변명하지 않고 목숨을 내놓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온 국민이 자유 민주 사회를 앞서 실천하는데 힘을 뭉쳐야 한다.

이 땅에 많은 소년 소녀 가장의 고난, 사회의 악습에 물든 못난 갑질의 행태, 여기에 순직한 일용직 청년의 애환, 그리고 범람하는 이혼의 연민과 불안전한 사랑의 작태 등이 모두 깊은 반성과 참회가 결여된 자업자득의 현상이 아닐까? 우리들은 자강불식(自彊不息)의 실체에 다가서서 공동체 의식을 자각하고 통일 천 년을 앞당기는 고마운 나날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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