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기쁨, 하청면 임유훈 어르신

하청면과 칠천도를 잇는 칠천연륙교를 지나려다보면 주변의 정자와 더불어 이색적인 비(碑)들이 세워져 있다. 다가가 알려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비(碑)의 내용에 이끌렸다. 공적비(功績碑)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다리가 생겼을 때의 감동과 감사는 익숙함으로 변한지 오래지만 이곳에는 마을사람들의 감사의 마음이 새겨져 있었다.

1927년생으로 올해 90세인 임유훈 어르신의 이름을 발견한 곳도 이곳이다. 100세 시대를 대변하듯 허리가 좀 아파 오래 걷는 것이 불편할 뿐이라고 말하는 임 어르신은 아직도 건장해 보였다.

"주변의 사람들이 웃는 것이 좋다"며 아이처럼 미소 짓던 임 어르신은 연초면 한내리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임 어르신이 살아온 90년 인생은 한국의 근현대사 그 자체였다.

현대인들이 교과서에서나 배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몸소 거쳐 왔을 뿐 아니라 변화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지켜봐 왔기 때문이다.

어려웠던 나라사정과 가정형편은 그를 배움의 길에서 삶의 전쟁터로 내몰았다. 짧은 교육과 곤궁하기만 했던 그의 삶에 기회가 찾아온 것은 마흔을 막 넘기기 시작한 1967년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15마력의 작은 구발동선 한 대를 구입해 정치망운반업을 하고 있었다.

잡은 멸치를 뭍으로 나르는 운반을 돕는 일이었지만 멸치잡이어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임 어르신은 신용있고 성실한 사람으로 통할 정도였다고 한다.

진실이 통해서였을까? 마산에 있는 지인이 어장을 권하게 됐고, 기회를 잡은 그는 치열하게 사업에 열중했다. 하늘이 준 기회였는지 어장을 맡은 뒤부터 멸치어획량이 늘어나 불과 2년만에 인수 할 때 떠안았던 부채를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사업은 나날이 발전해 갔다. 

임 어르신은 "내 삶에 대한 근면성실한 자세가 인생에 한번은 찾아온다는 기회를 가져다 준 것 같다"는 말로 사람이 만들 수 없는 역사를 풀어냈다.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자리를 굳힌 임 어르신이 다음으로 한 일은 지역사회 환원이었다. 1978년 연초면사무소 준공식에 도움을 줬던 임 어르신은 나눔의 기쁨을 알게 됐다고 한다.

임 어르신은 "내가 가진 것을 사회에 돌려주는 기부가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지 그 때야 비로소 알았다"라며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작은 것일지라도 나누고 더불어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 이후부터 그는 아낌없는 기부에 열중했다. 연초면 파출소부지 80평을 매입해 기증했고, 고향인 한내리에 창고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애쓸 때 50평을 선뜻 내놨다. 칠천도 학생들의 통학선과 도선의 낡은 엔진을 새것으로 교체해주기도 했다.

칠천연륙교가 만들어 질 당시 칠천도 연륙교추진위원 및 칠천도번영회장직을 맡아 경비일체를 부담했다. 그 공로는 2000년 1월 열린 준공식에서 공덕비로 이어졌고, 오늘날까지 보람으로 남고 있다.

임 어르신은 "칠천도에 다리 놓는 것에만 열중해서 모양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며 "오늘날 만들어지는 다리처럼 아치형이나 여러 가지 모양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못내 아쉬움을 드러냈다.

고기도 먹는 사람이 잘 먹는다는 말처럼 임 어르신의 나눔은 계속됐다. 칠천도 금곡회관 건설 당시 부지 100평을 기증해 또 한번 공덕비가 세워졌고, 매년 추석과 설이면 칠천도 10개 마을 경로당에 쌀을 10포씩 보내고 있다.

또 연초면 한내와 한곡마을에도 쌀 10포씩을 빠뜨리지 않고 있다. 아깝지 않느냐는 우문에 "좋은데 갈라고, 나 좋을라고"라는 현답으로 환하게 웃어 보인 임 어르신은 "내가 가졌다고 해서 내 것이 아니다"는 말로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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