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조근정훈장 받은 '변통' 김화순 전 주민생활국장

그의 별명은 '변통'이다. 공직을 천직으로 한 외길 인생 38년 6개월 동안 동료 혹은 선·후배 공무원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사람들이 나더러 변통이라 별명을 지어주더라고. 그런데 그 말이 그리 싫지 않은 게 변화를 두려워하기보다 뭐라도 저질러 보려는 노력해야 하는 게 공무원이기 때문이야."

19일 지난해 1월 공직을 퇴직한 김화순 거제시 주민생활국장을 만났다. 그는 "40년 가까이 설치고 다녔으니까 이제 좀 조용히 살아야지"라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1970년 둔덕 면사무소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해서 딱 38년 6개월 일했네. 그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라며 말을 이어갔다.

둔덕면이 고향인 그는 중학교 때부터 통영으로 나갔다. 삼촌댁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년 동안 대학입시를 준비 하지만 가난한 집안 살림과 삼촌의 권유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게 된다.

그의 부친은 한국전쟁 당시 22살인 그의 어머니와 4살배기인 그를 남겨두고 전사했다. 가장의 부재로 집안 가세는 늘 어려웠고 그래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의 꿈을 접고 바로 공무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13년을 둔덕면사무소에서 일한 그는 새마을 운동의 바람이 불 때 현장에서 논두렁을 달리는 젊은 공무원이었다. 새마을운동이 그에게는 가장 큰 화두였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어르신들을 찾아다니고 친구들을 독려하며 정부시책을 실현하는 최일선의 대한민국 공무원이었다.

당시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정부미 전면 재배 시책을 장려하는 일이었다. 일부 농부들이 일반벼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또 집집마다 식용으로 써야 할 곡식도 모자라던 시절, 정부에서 지정한 양의 추곡수매를 걷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는 13년의 둔덕면사무소 근무 끝에 신현읍사무소를 거쳐 군청에서 근무하게 된다. 군청 근무를 위해 주사에서 주사보로 1계급 강등까지 겪으면서도 불평불만 없이 성실히 근무했다. 공직이 천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군청의 주요부서는 물론 장승포시까지 다양한 요직을 두루 경험한 그는 지난 1996년 지역경제과장을 거쳐 그가 처음으로 공직을 시작한 둔덕면의 장으로 금의환향 한다. 면장생활 동안 그는 늘 고향의 주민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했단다.

길이 없어 불편한 마을은 새로운 길을 닦았고 가로등이 없는 곳은 가로등을 설치했으며 흉물로 방치돼 있는 석산은 녹화작업을 실시했다. 하지만 시골마을에 집행될 예산은 언제나 빠듯했고 그는 예산을 조금이라도 더 얻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시골 면사무소에서 출발한 공무원 생활이지만 누구보다 시민을 위해 변화를 꿈꾸며 살았던 그다. 그 변화의 수혜자는 거제시민 이었고 수혜자의 복지를 위해서라면 일을 저지르는(?) 변통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곡 피솔 마을에 분뇨처리장 건립 공사시간을 맞추기 위해 밤잠을 설치면서 일주일동안 코피가 멈추지 않을 정도로 업무에 시달리기도 했고 태풍매미 때에는 정전 복구안내 방송을 하기위해 발품을 팔기도 했다.

거제시는 지난 11일 시장실에서 퇴직공무원 10명에 대한 정부포상을 수여했다. 이날 정부포상은 공무원으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일이다. 그는 홍조 근정훈장을 받았다.

그는 "오랫동안 공직 생활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좋은 선·후배 공무원을 만났기 때문 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그는 후배 공무원들에게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은 옳다고 생각 한다면, 그리고 시민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당부했다.

39년을 지고 온 공직의 짐을 내려놓은 그의 어깨가 가뿐해 보였다. 요즘은 서예를 배우는 등 여가·봉사활동, 여행 등을 하며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는 "그 동안 틀에 박혀 살았는데 이제 돌아보지 못한 지인들도 만나고 자유롭게 담소를 나누고 살 생각이다"고 말한다. 하지만 거제시에 대한 걱정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 하다.

그는 지금 39년만의 달콤한 휴식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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