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농악지킴이 정옥식씨

“눈에 보이는 것만 신경 쏟다보니 거제에 무형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무형문화의 맥이 끊긴다는 것은 거제문화가 더 이상 없다는 것과 다름없지요.”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 농악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제의 상쇠꾼 정옥식씨(68). 너른 장평들 농부들의 애환을 닮은 장평두레농악을 이어왔고 500년 전부터 구국의 소리로서 그 맥을 이어온 거제칠진농악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를 만났다.

그는 1943년 장평리 790번지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한국전쟁 끝자락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해방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거제지역에 포로수용소가 들어서면서 그의 가족은 사등면으로 2년 동안 강제 이주를 해야 했다. 정부에 의해 이주 명령을 받으면서도 적절한 보상조차 받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포로수용소가 철거되면서 그의 가족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비옥한 장평들판은 비행기며 군용트럭이 짓이겨 놓아 더이상 농사가 불가능했다. 그는 “황무지 개간하는 일을 ‘논 치운다’고 했는데 그때 당시 논 치우러 가는 일이 어른들 하루 일과였지”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입에 풀칠도 못해 쌀겨로 만든 쑥버무리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많았다. 그는 나이 14살 되던 해 어머니를, 또 26살에는 아버지를 여위었고 45세 때에는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해야 했다. 가난을 업으로 여기고 삶이 힘들었던 젊은 시절 그의 마음을 다잡게 했던 것은 풍물이었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정월대보름 어른들이 지신밟기를 하며 풍물을 치면 손장단, 입장단을 냈다. 쓰다 버린 양철 조각으로 꽹과리 징 북 소고를 만들어 두드려댔다. 가락을 맞추고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악기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나이 22살인 1965년부터 본격적으로 장평두레농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장평두레농악의 2대 소임자가 자신의 선친(故 정치규)이었다는 사실을 거제시지 편찬과정에서 우연히 알게 된 후부터는 더욱 열심히 농악에 매진했다.

그리고 그는 지난 1996년 거제칠진농악 전수자인 故김관석옹(지난 2004년 8월 14일 작고)에게 거제칠진농악 기능보유자 전수식을 통해 정식으로 거제칠진농악 기능을 전수 받는다.

그 후 그는 장평두레농악과 거제칠진농악 전수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1994년 부터 지금까지 50회가 훨씬 넘는 수료식을 통해 2,000여명이 넘는 수료생을 배출했다.


2,000 여명의 수료생 중에는 지금 그의 아내인 송희영(여·55)씨도 있었다. 그녀는 그의 열정을 흠모해 10여년전 혼인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온통 거제칠진농악 전수 밖에 모르는 그와 함께 꽹과리를 챙겨들고 함께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부부는 어린이집과 초·중·고교 등 지역단체를 가리지 않고 전수활동을 펼쳤다. 부부는 2004년부터 사등면으로 이주, 성포중 학생들에게 거제칠진농악을 전수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사등면 주민자치센터에서 매주 월·수·금 2시간씩 사등면 주민들에게 거제칠진농악을 전수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16일 거제칠진농악 보존회를 창단했다. 요즘 그는 오는 정월 달집태우기와 거제시민 안녕기원제, 지신밟기 연습을 하면서도 거제칠진농악의 원형보존을 위해 전문가들을 통한 거제칠진농악 현대식 악보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보존과 전수를 위해서는 그에 맞는 기량과 체계적인 자료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거제의 무형문화가 쇠퇴하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 하며 “한 평생이 아쉬운건 고단했던 삶 때문이 아니라 거제칠진농악의 맥을 잇지 못하고 올바른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민초들의 시름을 더는 한바탕 굿판이었고 구국의 횃불이었던 거제칠진농악이 지역축제의 양념처럼 형식에 그치고 있는 현실에서도 전수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요즘 건강이 좋지 않아 칠진농악을 제대로 전수받을 제자육성이 더욱 간절하다”며 “하루빨리 인근 통영이나 고성처럼 전통문화를 계승할 수 있는 전수관이 건립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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