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길/거제수필문학회 회원

초봄, 마을 앞 간척지 저수지. 붉은 벼슬을 주억거리며 물기새들이 분주하게 헤엄치고 다녔고, 갈대와 수초가 어우러진 곳에서는 산란기를 맞은 잉어들이 불쑥불쑥 꼬리를 물 위로 솟구치며 짝짓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굣길 책 보따리 어깨에 대각선으로 멘 개구쟁이들이 둔덕 천 징검다리를 어미 따르는 새끼염소들처럼 건너 와서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저수지 둑에서 피비(삘기)를 뽑아 먹으며 놀았다.

방천 밑에 엎드려 빨간 집게다리 농게를 돼지풀로 꼬셔내는 장난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느닷없이 형들이 나타나서 우리들을 싸움 붙이던 곳도 저수지 둑이었고, 갯논에서 모내기하던 아주머니들이 우리들을 불러 바가지에다 못밥(모내기 때의 새참) 얻어 주던 곳 또한 저수지 둑이었다.

자리모내기가 끝나 갈 무렵이면 동네 처녀들은 거의가 녹초가 되어갔고, 누군가 못줄 뒤로 나란히 하늘향한 궁둥이들을 향해 일부러 물 튀겨 모 한 춤을 던졌다.

우리는 모수발(모심기에서 모를 나르며 뒷수발 하는 것) 잘하면 사위 삼을 거란 말에 열심히 모수발했건만, 그 후 누구도 모수발 잘해서 사위됐다는 말은 끝내 들어보지 못했다.

태어나서 오십이 넘도록 아직도 살고 있는 고향 방답구미(거제시 둔덕면의 방답마을)의 어릴 때의 봄 저수지는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떡갈나무에 연초록 새순이 필 때면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아침마다 소 바탕인 송골산으로 소먹이러 갔다.

소들을 대충 잔솔 나무에 매어두고 이슬에 젖은 바짓가랑이를 말릴 사이도 없이 잽싸게 밥 먹고는 학교로 뛰었고, 학교를 마치고는 타작마당에 모여 구슬치기, 딱지치기, 표때기를 하며 신나게 놀다가 목이 마르면 찬물에 사카린 타서 둘러 마시고 다시 소 먹이로 송골산에 올랐다.

팔월 염천, 덜거랑 포구나무에 왕매미와 소매미 울음소리가 절묘한 화음을 이룰 때, 우리는 냇가에 멱 감으로 갔다.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물속에서 놀다가 다시 해가 구름 속에서 ‘김치국에 밥 말아먹고 장구치고 나올 때’ 까지 기다렸다.

보리타작은 보리밥이나마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 힘든 뒤처리도 마다하지 않았고, 보릿단과 한나절 씨름하고 나면 따가워진 몸들을 냇가에 가서 등목을 쳤다.

벼가 누렇게 익을 때면 집집마다 수틀(숫돌)에다 쓱쓱 낫을 갈았고, 시퍼렇게 날 선 낫으로 파드득파드득 나락포기를 열심히들 잡아 당겼다.

타작마당에 볏가리를 몽고텐트처럼 쌓아 놓고 추워질 때까지 수시로 탈곡을 하였는데, 발굴리기 탈곡기의 ‘앵냥’ 거리는 소리가 암담, 중담 두 타작마당에 끊이질 않았다. 친구들과 볏가리에 올라가 뭉개고 놀다가 주인에게 욕바가지로 얻어먹기도 하였고, 누군가가 볏가리에다 불을 내기도 하였다.

추석날이면 다안등에는 수령을 알 수 없는 돌배나무가지에 그네가 매어졌고, 때때옷에 꽃신을 신은 계집아이들은 쇠널 쪽 하늘을 마음껏 발로 찼다. 남자애들은 노란 단추 달린 인민복 같은 학생복 한 벌에 까만 운동화 한 켤레 얻어 신으면 그저 그만이었다.

추수가 끝난 갯논에는 하늘 가득 청둥오리 떼와 기러기가 편대를 지어 날아왔는데, ‘기럭아 기럭아 줄져라’ 하면 신기하게도 기러기들은 브이자형 줄을 지었다.

엿장수를 그만둔 후 시작한 친구 아버지의 뻥튀기 온도계가 삼백 도에 이를 때면, 쪼그리고 앉아 지켜보던 친구는 아버지에게 도수를 알려주었고,

“아버지! 삼백도가 다돼가요.”
“오! 그랑께 꼬신 내가 나더라.”

그때 코를 훌쩍이며 서있던 우리는 손으로 일제히 귀를 막았다. 될 수 있으면 망태기 가까이에 섰다가, 뻥! 소리와 동시에 하얀 연기 속으로 돌진하여야만 겨우 몇 톨의 튀겨진 강냉이 알들을 주워 먹을 수 있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아버지들은 메구패(농악대)를 꾸몄다. 깽수(꽹과리를 치는 농악대의 상쇠)가 중중모리에서 드디어 휘모리장단으로 바뀔 때쯤이면 벅구놀이는 몸 전체가 기운 팽이처럼 신기하게 돌았고, 덕조 아버지의 돌려치는 장구는 누가 봐도 멋들어졌었다.

지금은 아쉽게도 마을 앞 저수지는 경지정리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다안등 돌배나무도 태풍 ‘매미’로 인해 한쪽 가지는 그때 부러지고 남은 가지마저도 말라 죽어 마음이 아프다.

소 먹이던 송골산에 그렇게 높아 보이던 여우바위가 소나무 숲에 가려 보이지도 않고, 공차고 놀던 재모가지 고갯마루는 도로가 포장되면서 아예 없어져 버렸고, 쇠널 선창으로 소금가마니 져 날라 잔돈 벌어먹던 염전은 주인이 서울사람으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태어난 고향에서 여태도록 살고 있는 나이지만, 아직 창창한 중년인데도 벌써 추억들이 이리도 새록새록 한데, 앞으로 더 나이 들면 얼마나 아련할까. 벌써 차가워진 이슬을 밟으며 갯논 둑을 따라 그 당시를 회상하며 아침 길을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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