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아주동 장터목서 시위대 거리 행진
주모자 투옥, 폭행등 갖은 고문 당해

창간 34주년을 기념해 1989년 창간호부터 인터넷신문이 없었던 2006년 5월까지 보도된 기사(지역역사) 중 독자들의 관심이 높았고 중요한 기사를 인터넷에 업로드합니다. 이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 거제지역 발전을 위한 역사적 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1989년부터 발행된 과거 기사를 톺아보시고 거제역사를 알아가십시오.  - 편집자 주

거제신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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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75주년을 맞은 '기미독립만세사건'-'3 1운동'이 각 기관마다 조촐한 기념식으로 그 명맥만 유지하는 인상을 주고 있어 정작 3·1만세사건과 관련된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1910년 8훨23일 치욕의 한일합방 조인식이 체결되고 동 25일 고종황제에 의해 합방에 관한 조서가 공포되자 우리나라 역사는 사상 유례없는 최악의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이날로부터 한국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어 인권과 자유를 빼앗긴 채 나라없는 설움을 당해야만 했다.

이에 뜻있는 사람들은 힘을모아 조국광복의 독립을 위해 앞장서게 되었고 이곳 거제도에서도 두차례에 걸쳐 만세시위 운동을 감행, 많은 주모자들이 투옥당하거나 고문을 겪었다.

1919년 음력 3욀3일 당시 거제도의 유일한 개화중심지이며 재력〔富力)의 집결지었던 이운면(현 장승포시) 아양리에서 당시 지방유지인 윤택근, 이인수, 이주근씨 등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첫번째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만세시위는 200여명이 참석,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첫승첩을 기리는 당등산(아주당산)에서부터 시작돼 시위행렬이 아주 장터목시장까지 줄을 이었고 만세소리는 하늘을 진동했다.

그러나 헌병의 총칼앞에 시위는 무산되고 만세운동의 주동자인 윤택근, 이주근, 이인수,윤주권, 이공수, 이주목, 윤사인씨 등은 연행돼 최하 징역 8읠에서 1년 이상 실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두 번째 만세 시위는 천주교신자들이 주축이 되어 옥포를 중심으로 발발했다. 4월6일 오전 11시 주종찬 휘하 지방 젊은 청년들은 옥포망덕봉산(옥포국교 뒷산, 지금은 주택지로 변했음)에서 거사키로 합의하고 300여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 시위대는 아주 당목(장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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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옥포를 떠난 시위대는 비암바위 모퉁이를 돌아 용싯골·탑골부락을 거쳐 목적지인 아주 장터에 도착해 당시 이운면사무소를 점거, 이곳에서 다시 독립만세를 외치며 조국을 잃은 슬픔에 대성통곡했다"고 거제군지(1964년 발간)는 기록하고 있다.

이때 피검된 주종찬외 10여 명의 주동자는 갖은 고문과 구타 심지어는 발뒷꿈치에 쇠줄을 꿰어 온 동네를 끌러 다니는 수모와 치욕을 겪은 뒤 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이런 만세운동의 이면에는 당시 거제도의 생활환경이 일본인들에 의해 거의 지배되다시피 하였으므로 배일감정이 고조되어 있었고 3·1운동 발발 당시 장승포에는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입좌촌이 형성돼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이곳 주민들의 항일정신은 그 어느 곳보다도 앙양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3·1운동이 발발했던 거제·둔덕·사등 장승포 등지의 주동자들은 통영 만세사건에 참가했으며 해방이 되자 일인들은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가고 미처 못 떠난 헌병과 그 가족돌은 주민들에 의해 몰매를 맞는등 수모를 당했다고 당시 국산 성당 부근에 거주했던 어느 할머니는 말하고 있다.

현재 거제도내 3·1만세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없다.

"지금은 가고없는 역사의 혼이라도 위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어느 할머니의 얘기처럼 이번 3·1절에는 이들을 위한 추도식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아무도 찾아와 주는이 없는 옥포1동 주택가에 서있는 외로운 비석들.

지난 73년 옥포노인회에 의해서 주종찬 지사의 추념비만 망덕봉산에 건립되고 나머지 지사들의 행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지금 기제도에 거주하고 있는 그들의 후손으로는 윤택근씨의 장남 윤병규씨(76·아주동 288와 주종찬 지사의 장손 주부근씨(56·옥포동1004). 이주근씨의 장남 이 구섭씨(70 아양동 428)등이 생존해있으며 이인수씨와 직계가족들은 그후 고항을 떠나 현재 서을 강서구 공항동에 거주하고 있고, 이주목씨는 그때 당시 만주로 망명했다고만 전해지고 있어 그 시대를 살아온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이금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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