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위숙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차를 마셨습니다. 식후나, 사람을 만날 때나, 심심할 때 차를 마십니다. 비가 오면 분위기 살린다며 마시고, 우울하면 기분을 바꾸기 위해 마시고, 즐겁고 흥분되면 차분해지려고 마시기도 합니다.

더우면 냉차로 마시고, 감기가 올라치면 꿀과 함께 뜨겁게 다려 마시기도 합니다.

“연잎 사이로 비껴간 바람은 어디로 흘러 가없는~”
“꽃진후에 작은 새 우네~"

연잎바람이란 ‘홍순지’의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대금의 전주 부분이 깨끗하고 우아합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하늘처럼 가슴이 활짝 열립니다. 가볍고 느슨한 옷을 갈아입습니다. 허리를 곧추세워 앉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습니다. 입은 가볍게 다물고 혀는 천장에 닿게 합니다. 숨을 고르게 쉬면서 귀는 기우려 봅니다.

무슨 소리를 듣기보다는 생각이 팔려 다니지 않기 위함입니다. 마음을 정하게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갑자기 불안해지고 갑갑합니다. 안절부절 못하다가 숨이 멈출 것만 같아서 음악을 껐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느린 음악에 이다지도 불안해하는 것은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사라진 탓인가 봅니다.

지난 여름동안 바쁘게 보냈고 느릿하게 움직였다가는 어느새 추월당하고 손실을 보고 마는 생활이다 보니 이런 느린 노래를 끝까지 여유롭게 음미하며 듣는다는 게 힘들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순수하고 맑은 곡이 왜 이다지 가슴을 울렁이게 하고 불안하게 한단 말입니까.
연잎바람 소리가 지나온 생활을 반성하게 합니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크게 하고 연잎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우려 봅니다.

그리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봅니다. 마음을 어디에도 붙들어 매놓지 말고 그저 지켜보라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다시 음악이 몸에 와 닿습니다. 잠시 번잡하고 들떴던 마음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차를 마시는데 있어 또 하나의  즐거움은 같이 차를 마실 수 있는 벗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벗이 없는 사람은 어찌 생각하면 매우 박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차를 마시며 나눈 이야기 속엔 허언이 있을 수 없고, 허풍이 있을 수 없으며 뒤가 깨끗합니다.

차는 마실수록 정신이 명료해지는 음식이기에 서로에게 허심탄회하게 대할 수 있다면 청정한 벗을 두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차를 내 주십니다. 평소 맛있는 차를 다려 주시기에 은근히 기대를 했습니다.

제 마음을 꿰뚫어 보았던지 이번에는 연차였습니다. 큰 사기그릇에 연꽃을 앉히고 녹차를 띄우고 연꽃 위에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었습니다. 꽃 피는 것을 도와줘야 하기에 꽃잎을 벌려 주었습니다.

차 내는 동작 하나 하나에는 자연스러움과 부드러움, 여유로움이 절로 느껴집니다. 그 속에 흐르는 몸에 밴 지극정성으로 부드럽게 차를 다려 내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함께 차를 자주 마시다 보면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말로 나타내지 못한 서로의 속내도 느낄 수 있고 마음도 말없이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담 없이 차를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참맛을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꽃잎이 물위에 피어나자, 노란 수술이 푸른 연밥을 둘러싸고 빽빽하게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향기가 그윽한 차였습니다. 몇 번을 우려서 먹었더니 뱃속에 연못이 하나 출렁거리는 것 같습니다.

이제야 여유로운 미소가 나옵니다. 어지러운 생각들, 마음속 분노, 쓸데없는 집착, 물욕들이 연잎 바람에 다 실려 가고 어느 새 마음은 가벼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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