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혜량 수필가
고혜량 수필가

건너다보이는 섬은 어둠을 베고 누워 있다.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별빛이 내려앉은 밤바다의 물결이 흔들리듯 내 가슴에도 잔잔한 너울이 인다. 눈을 감는다. 아무도 살지 않는 섬에 작은 호롱불 하나가 켜진다.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유년의 기억 속 불빛이다.

섬에는 오로지 외갓집뿐이었다. 내가 외갓집에 갈 때는 언제나 외삼촌이 거룻배로 나를 실어다 줬다. 낡은 목선에서 나는 노 젖는 소리를 들으며 외갓집으로 향하는 뱃길은 언제나 설렘으로 가득했다. 

외삼촌은 능숙한 노질로 흐느적흐느적 부드러운 물소리를 내며 섬을 향해 나아갈 때, 키가 큰 바다해초들이 노의 방향에 따라 물속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물비늘이 은빛으로 출렁일 때는 그것이 마치 반짝이는 모래의 석영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발을 배 난간에 올려놓고 노를 젓는 외삼촌의 모습은 참으로 멋있었지만, 이물에 앉은 나는 바다 속이 훤히 보이는 물길 속에 눈을 주느라고 고물 쪽으로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바다 속 모습에 정신이 팔려 있노라면 외삼촌은 배를 이리저리 흔들어 놀라는 나를 보며 웃음을 짓기도했다. 

육지 선창에서 섬까지는 불과 50m 정도, 거룻배로 넉넉잡아 십 분 남짓 걸렸다. 외가로 향하는 그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배의 물칸 안에는 자망으로 잡은 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고, 배의 바닥에는 불가사리나 작은 물고기들이 바싹 말라 미라가 된 채 붙어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주워 바다 속으로 던졌다. 던져진 물고기들이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바라보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이미 죽어버린 생명이라지만 자기가 살았던 물속으로 되돌려 주고 싶었다. 

때로는 배 난간에 걸터앉아 물살에 발을 담그고 뒤꿈치를 차박거리며 놀다보면 어느새 배는 섬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때 즈음이면 외삼촌의 움직임과 바쁘게 노를 젓는 품새도 달라졌다. 선창 가까이에 다가가면 노질을 멈추고 커다란 갈고리 같은 삿대를 바다 속으로 넣어 배를 밀기도 당기기도 하면서 배가 다치지 않게 천천히 선창에 배를 대었다. 

'소록도(小鹿島)'라는 이름을 가진 순한 사슴을 닮은 섬. 그러나 그런 본래의 이름보다는 '딴녹섬'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섬의 불편함 때문이었는지 외가는 녹산으로 이사를 했고, 그 후로 외갓집을 가던 추억은 일곱 살 무렵에 멈춰졌다. 해변을 돌아가며 고둥을 줍거나, 파도에 닳고 닳은 새하얀 조개껍데기를 모아 소꿉놀이를 하던 재미도 유년의 풍경 속 삽화로 남아 있을 뿐이다. 달빛만큼이나 흐릿한 불빛이 비치는 작은 섬은 사람이 산다는 것만으로 사람 냄새가 나는 따뜻한 섬이었다. 그러나 외갓집의 흐릿한 불빛이 꺼진 후 수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로 남아 있다. 그저 유년의 추억 속의 섬, 그리움의 섬이 되고 말았다. 

섬!
바라다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 안에 갇힌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 갇힘은 어쩔 수 없이 그 공간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갑갑함이나 구속이 아니라 자유로움이다. 섬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초조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다. 어떤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 섬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내 마음은 이미 휴식의 섬 안에 있는 듯 편안하다.

그리움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 바다위의 외로운 섬이 되고 싶어 한다. 외롭다 하면서도 섬이 되고 싶어 하는 이 지독한 모순은 무엇일까. 지독히도 외로워 섬이 되고, 그 섬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에 제각기 선창에 매어둔 배가 되어 있다. 그래서 집어등을 밝히고 밧줄만 풀면 곧장 섬으로 나갈 채비를 완벽히 하고 있다. 삶에서 채워지지 않은 것들을 오롯이 섬이라는 곳에서 혼자돼 스스로를 견디어 낼 시간을 가지고 싶어 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고향을 떠나 살면서도 바다만 바라보면 고향 마을의 작은 섬이 문득 떠오르곤 했다. 사는 일에 지칠 때, 어쩌면 섬으로 향하는 뱃길에서 설레었던 그 마음을 느끼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 가장자리에 섬 하나를 담아놓고 사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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