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세 만학도 정종원씨…60에 중학교 검정고시→6년만 대학교 졸업

나이 60에 중등 검정고시를 시작으로 6년만에 대학교 과정을 마친 정종원씨. /사진= 강래선 인턴기자
나이 60에 중등 검정고시를 시작으로 6년만에 대학교 과정을 마친 정종원씨. /사진= 강래선 인턴기자

# 100세 시대, 나이는 숫자에 불과

황금색 들판이 눈부신 거제면 시골길을 가는 내내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는 인생이었다.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생 100세 시대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현재 어떻게 살아야 잘산 인생인지 화두가 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나이 60에 중등 검정고시를 시작으로 6년만에 대학교 과정을 마친 정종원(66)씨야 말로 진정한 100세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어 인터뷰를 요청했다.

내세울 것 없이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며 극구 마다했지만 설득해서 만난 그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있는 이 시대의 위대한 아버지였고 훌륭한 농부였다.

"지나온 60년은 그냥 앞만 보고 형제와 가족들 생계를 책임진 가장의 역할에만 충실히 살아왔습니다."

정종원씨. /사진= 강래선 인턴기자
정종원씨. /사진= 강래선 인턴기자

그러다 나이 육십에 찾아온 공허함과 허무감이 그를 괴롭혔고 결국 나머지 인생은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고 선언하고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중등 검정고시를 시작해서 6년만에 진주 경상대학까지 졸업했다고 한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였지만 영어 단어를 외우고 수학문제를 푸는 것이 너무 행복했고 낮에는 아내와 토마토농사·야간에는 진주에 있는 대학교까지 가는 길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교수님이 가르쳐주는 여러 가지 지식은 그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줬고 평소 몰랐던 나무에 관한 전문적 지식은 알면 알수록 새로운 욕구가 샘솟아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기억했다.

4년간 열심히 공부한 대가는 성적 장학금으로 보답을 있을 때는 마냥 자랑스러웠지만 어느 순간 어린 학생들의 것을 빼앗는 건 아닌가 싶어 이 또한 배려해야겠다고 생각해 다른 학생들에게 양보할 정도로 희생과 배려의 삶을 살아왔다.

그가 지난해 취득한 학위증을 가지고 약속을 지켰다고 자랑하려고 부모님 산소에 갔지만 한없이 울고만 왔다고 한다. 너무 간절한 꿈이 이뤄지면 할 말이 없어진다는 말이 실감 났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전공한 나무가 너무 좋아 또다른 목표를 세우고 있다는 그는 아내만 허락해 준다면 공부를 계속해서 진짜 나무박사가 되는 것이 새로운 목표라고 말했다.

정종원씨. /사진= 강래선 인턴기자
정종원씨. /사진= 강래선 인턴기자

# 간절히 바라면 꿈은 이뤄진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초등학교 졸업장이 마지막 학력이 됐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동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친구들이 책가방 메고 등교할 때 그는 지게를 지고 산에 올랐다. 땔감 나무를 찾아 산을 헤메 한 짐 지고 내려와 장에 나무를 팔러 가는 길에 친구들을 만나는 게 너무 창피해서 둘러 가고 싶어도 어머니랑 같이 가기에 그냥 머리를 숙이고 가는 게 고작이었다.

한 번은 어머니와 땔감을 팔기 위해 장에 가다가 아는 친구를 만날까 싶어 숨어 있었는데 어머니가 나를 찾는 것을 알면서도 나오지 못하고 학생들이 지나가고 난 뒤 갔다.

그날 밤 부엌에서 어머니의 서러운 울음소리를 들었다. 어린자식을 학교도 못 보내고 일을 시키는 게 더 마음 아팠을텐데 미안하다며 눈물만 흘리셨다. 그때 어머니께 약속했다. 다음에 돈 벌어서 꼭 대학에 가겠다고.

어머니와의 추억에 눈가를 적신 그는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지나온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지나는 듯한 표정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부모님을 돕기 위해 산에서 나무하고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고 스물다섯 청년이 된 이후 원양어선 선원으로 인도양과 대서양을 누비며 고기 잡던 시절까지 주마등처럼 지나는 옛 추억에 말문이 막힌 게 아닐까 싶었다.

옥산숲 노거수를 바라보던 그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잘산 인생인가에 대해 물었다. "정답이 있겠습니까?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만 남는 것이 인생인데, 그렇다면 하고 후회하는 것이 더 나은 인생이 아닐까 싶다"고 웃었다.

"그동안 남에게 내세울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조금 낫다고 생각하는 건 성실과 정직 그리고 가족에 대한 희생과 배려로 나름 만족하며 잘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그의 인생 8할은 가족을 위한 희생이었다. 7남매 장남이라는 책임감으로 아버지를 도와 초등학교 졸업 후 바로 농사일부터 가축 기르는 일까지 돈 버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그러다 20대 초반에 원양어선 선원이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참치 원양어선에서 8년간 일했다. 이후 5년은 스페인 선적 트롤어선 선원으로 일해 동생들 다 공부시키고 난 뒤 결혼을 하기 위해 하선했다.

그의 나이 38세에 부인을 만나 결혼했고 더이상 배를 탈 수 없어 부모님의 농사일을 물려받아 농부의 길을 걸었다.

30년을 지켜온 700여평의 비닐하우스는 토마토 농사를 지어 세 자녀 대학공부까지 시켰고 새집도 장만했으니 자신의 가정을 지켜온 터전이며 그를 지탱해준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정종원씨. /사진= 강래선 인턴기자
정종원씨. /사진= 강래선 인턴기자

# 거제 노거수 생태·역사 박사 소망

그는 또 두 번째 도전을 준비중이다. 대학에서 배운 나무가 너무 좋아 석사·박사 과정을 통해 거제에 있는 노거수 생태와 역사에 관한 논문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거제에는 200년 이상된 노거수가 지천인데 보호수로 지정된 일부를 제외하고는 관리가 안되고 있어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 교수에게 도움을 요청해 옥산숲에 있는 노거수 19종에 대해 나무 이름표를 달아줬다. 나무는 인간에게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이로움을 주는데 이름이 뭔지 나이는 얼마나 됐는지 알 수가 없어 그가 직접 나서 나무이름을 달았다.

이후 옥산숲을 찾아온 외지인들이 보고 '아! 이게 팽나무, 이게 함박나무네 신기하다'며 관심을 보여 자신이 나무 이름표를 달아주는 봉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며 거제시의 도움을 받아 거제 노거수에 학명 팻말을 달아주고 나아가 역사와 생태를 곁들여 주고 싶다며 이를 위해 공부를 계속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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