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혜량 수필가
고혜량 수필가

그냥 두기 아까운 햇살이다. 평발이라는 이유로 걷는 것이라면 질색이지만, 오늘은 하릴없는 사람처럼 어슬렁거리며 아파트 단지를 걷는다. 다 늘어진 티셔츠에 트레이닝바지, 벙거지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으니 이상하게도 뻔뻔스러워진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봄꽃이다. 아직은 바람이 찬데 잎도 없는 나뭇가지에 송이송이 꽃이 매달려있다. 부지런한 '겨울눈' 때문이다. 겨울눈이란 이름만으로 겨울에 생겨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여름부터 준비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이른 봄꽃을 보는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 무더운 여름 땡볕과 칼날 같은 찬바람을 견디며 피운 봄꽃은 나무가 토해 낸 아픔인 것을. 숱한 사연을 꽃눈에 품어 새긴 시간의 흔적이리라.

꽃샘바람이 인다. 햇살이 가득한 바깥 풍경에 따뜻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옷깃을 여며보지만 옷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 썰렁하다. 겨울의 긴 꼬리를 완전히 감추기엔 아쉬웠는가 보다. 집을 나설 때와는 달리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춥다는 이유로 이십여 분 정도의 산책을 끝으로 집으로 향한다. '꽃구경에 봄바람 한 번 쐬고 걸었으니 안 한 것보다는 낫겠지' 게으른 나 자신에게 던지는 위로의 말이다.

꽃만 보고 걷느라 보지 못 한 것일까. 이사를 간 모양인지 분리수거장 옆에 폐기물 스티커가 붙은 가구들이 버려져있다. 슬쩍 옆 눈으로 살펴보니 가구 하나하나 흠이라고는 없는 물건들이다. 장롱에서부터 서랍장, 콘솔 그리고 작은 소품들까지 한 살림을 차리고도 남을 것 같다. 그 옆에는 전자제품까지 아무렇게나 쌓여있다. 잰걸음이 느릿해지면서 시선이 자꾸만 그쪽으로 쏠린다. 그냥 지나치기엔 물건들이 예사롭지 않다. 발길을 돌리려니 도둑질을 하려는 것도 아닌데 괜히 뒤통수가 켕긴다. 기웃거리며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가구들 틈 사이로 커다란 액자가 보인다.

아, 짧은 외마디. 웨딩촬영 사진이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검은 턱시도 차림의 신랑. 높은 천정에 매달린 크리스탈 샹들리에 조명아래 두 남녀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에 겨운 얼굴이다. 계단에 선 두 사람은 오롯하니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듯 서로를 바라보며 농염한 눈빛으로 웃고 있다. 이렇게나 애틋해 보이는데 무슨 사연일까.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내 가슴이 이리도 내려앉는단 말인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느끼는 이 몹쓸 기분은 무엇인가. 손때 묻은 가재도구도, 아이의 물건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함께 한 시간이 길지 않은 듯하다.

이별 없는 만남이 말처럼 쉽겠는가 마는 '그래, 아닌건 아닌 거지 오죽했으면….' 아픔과 기다림의 시간을 인내한 봄꽃은 피고 있는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바빠진다. 서늘한 내 가슴을 가라앉히려면 따뜻한 녹차라도 한잔 마셔야겠다.

찻잔으로 떨어지는 찻물소리가 맑다. 조그만 잔에 담긴 연한 빛깔의 녹차를 한 참 바라보다 이제는 사라진 풍습하나가 떠올랐다. 어머니는 시집가는 딸에게 차(茶)씨를 넣은 주머니를 혼수 속에 넣어줬다, 차나무는 모종이 아니라 씨를 심는다. 돌도 뚫고 들어갈 만큼 땅속으로 깊고 곧게 뿌리를 내리는 탓에 처음 심겨진 곳에서 옮겨 심으면 잘 자라지 못한다. 이런 차나무의 속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직 한 남편만을 섬기고, 죽어서라도 시집의 귀신이 되라는 간곡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찻잔을 쥔 손이 따뜻하다. 손만큼 마음까지 따뜻해지면 좋으련만. 요즘 세상에 무슨 실없는 생각인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깊이 고민하고 아파했을까. 이별이 서로에게 주는 고통을 끝내게 하고, 서로의 삶에 새 희망과 행복의 길을 열어준다면 아파도 거쳐야 될 일일지도 모른다.

자꾸만 마음이 산란해진다. 서로를 바라보던 신랑, 신부의 그윽한 눈길이 자꾸만 찻잔위에 비친다. 돌아서지 않을 길이라면 액자 속 사진이나 떼어내고 버릴 일이지. 두 사람의 저 사랑스런 미소는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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