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김계수 칼럼위원

순식간이다. 서로의 아픔과 슬픔에 관심가질 여유도 없이 1년의 절반인 6월이 흘러간다. 내 아픔에 또는 슬픔에 쑥스러워하는 동안 그 심각성이나 질감의 정도를 느낄 여유도 주지 않고 마구잡이로 세월을 먹어치우는 존재는 무엇인가. 정치와 사회적 제도인가? 애써 참고 견디며 살아내야 하는 생의 본능인가? 다른 사람이 아파할 때 인간으로서 함께 슬퍼하고 공감하는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할 때 우린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슬픔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할 여유를 부끄러움 없이 가져야 한다.

봄에 피는 화려하고 예쁜 꽃들도 오랜 추위와 어둠을 번갈아 참고 견디었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봄에 피어야 할 진달래나 벚꽃이 갑자기 가을이나 겨울 초입에 피는 경우가 있는데 기분이 어떻든가? 꽃이야 적당한 온도와 습도·영양분에 의해 피었겠지만, 계절과 밤과 낮의 시간을 어기고 핀 그 꽃이 아름답기야 하겠는가. 타인의 불행은 나에게는 행운이 되는 경우가 있겠지만, 타인이 슬픔을 견디고 일어날 때까지 비난을 멈추고 충분히 기다려줘야 세상이라는 꽃이 필 것이다.

멈추고 기다리지 않고 강제적으로 습관적으로 생겨버린 축복은 비난받거나 어느 한쪽의 빗나간 성과물일 수 있다. 봄에 피는 꽃이 겨울에 피어난 것처럼 위험한 축복이다. 인간도 자연처럼 계절과 절기에 순응해야 한다. 상대와의 경쟁에서 이겼다고 무너진 상대를 짓밟고 무시하고 경쟁에서 응원했던 주변 경계인들마저 적으로 오도하는 행위는 없어야 한다.

감염병 대유행의 끝이 보인다. 그동안 감염병을 극복하기 위해 감당해야 했던 강제적 거리두기를 견디면서 사실은 실감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다. 밤과 낮의 구분과 시간과 공간의 구분이 불분명해졌다.

이는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삶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이 아니라, 멈추어지지 않는 시간과 공간이 허물어짐으로써 인간 존엄의 최고 가치인 사랑과 양심마저 편리함에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손가락 한 번으로 무엇이든 집 앞까지 배달되는 편리함에서 이제는 양심과 사랑까지도 정말 손가락 하나로 빌릴 수 있게 되었으니 봄에 피는 꽃이 가을에 핀들 무슨 대수이겠는가!

팬데믹이라는 위험에서 벗어나고 있다. 위험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안심은커녕 두려움과 불안이 깃드는 게 사실이다. 2년 넘게 불안의 시절을 참고 견디는 동안 너와 나, 그리고 모두가 치유가 필요한 시점이다. 사람들이 아프고 지쳤다. 치유하고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전국 동시 지방선거를 치르면서 아픈 사람과 치유해야 할 사람들의 경계가 혼란스러워졌고 고통이 외면당하고 있다. 사람들이 지치고 아프다는 것이 반드시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것이 아닐 수 있지만, 그 경계를 누가 함부로 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떤 사람을 기다려준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몰두한다는 것이고, 그 기다린 시간만큼 이해하고 다시 관계 회복을 위한 설레이는 만남이 보답으로 주어진다. 긴 시간 동안 잘 참아왔다. 정말 긴 고통이었고 누구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많은 생명이 아파했거나 사라졌고,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자연을 통제해 온 결과가 주는 엄중한 메시지도 함께 느꼈다.

아무튼, 지금 살아가는 모든 생명은 치유와 회복이 필요하다. 팬데믹에서 더 고생한 자, 덜 고통받은 자, 선거에서 이긴 사람, 진 사람 할 것 없이 인간이 서로 누려야 할 여유와 포옹해주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손가락 하나로 편리해지는 순간을 거부하고 함께 만나고 이야기하여 느리게, 느리게 멈추고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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