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근 조선소 노동자
박보근 조선소 노동자

큰 부자는 아니더라도 아래 윗땀에 장리쌀을 풀어먹일 정도 되는 전답 마지기를 부치려면 머슴 서넛은 부려야 했다.

머슴은 조선시대 주인의 재산으로 취급하던 노비와 그 신분이 달랐다. 전답이 없어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평민이 소작을 부치거나 고용 계약을 하여 새경을 받고 일하는 머슴이 됐다.

중종 때 최세진의 훈몽자회에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머슴은 조선 시대에 이미 농업 생산에 한 몫을 담당했으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노사관계를 맺은 노동자 계급이었다. 이 머슴들은 노비와 달리 천대받지 않고 농사를 짓는 능력에 따라 새경을 정했다.

그중 최고 예우를 받는 상머슴은 주인과 맞담배에 겸상 대작도 할 수 있는 예우를 받았다. 그는 주인의 말에 따라야 하지만 책임지고 맡은 기간 동안 모든 농사일을 아우르며 이끌었다.

오십여 마지기 전답 구석구석 손바닥 들여다보듯 해서 어느 논이 수렁논인지 마른논인지 삽을 찔러보지 않아도 쩍밭인지 살밭인지 훤히 꿰었다. 이웃과 물꼬 싸움에도 밀리지 않고 큰물이 나면 매양 터지는 논둑에 미리 말뚝을 박고 대나무로 옹벽을 쳤다.

모든 밭일 들일에 집 안팎 일까지 아우르고 중머슴과 어린 꼴담살이들을 이끌자면 일손도 잽싸고 야무져야 했다. 쟁기질이나 써레질을 빠르고 잘하기도 했지만 온종일 부려도 소가 지치질 않았고 아낙네들 모를 꽂는 손에 덩어리 하나 걸리지 않는다고 좋아했다.

가을걷이 볏짐이 고샅으로 들어오면 지게와 사람은 뵈질 않고 늘어진 벼 이삭만 들썩들썩 걸어왔다. 초가지붕 이엉을 덮어도 용마름은 꼭 그가 맡아 엮었다. 어린 부사리 코를 꿰어 일소로 길들이는 일도 그만이 할 수 있었다.

중머슴은 어깨너머로 상머슴의 일을 배우며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았다. 꼴담살이가 베어 온 풀에 짚이나 보릿대를 켜켜이 쌓으며 똥오줌을 뿌려 두엄을 만드는 일은 하찮아 보이지만 한 해 풍흉을 가름하는 일이다. 배합이 적절치 않거나 뒤집어 쌓는 때를 맞추지 못하면 생거름이 되거나 고루 삭지 않았다.

낫을 갈거나 도끼날을 벼리는데 날을 빨리 세울 욕심으로 옥갈아 금방 무뎌지게 만들면 주인에게 불벼락을 맞았다. 농기구를 손질하고 꼴망태나 바지게 대비 소쿠리 같은 도구는 중머슴 몫이었다.

따로 주는 새경은 없고 먹여주고 재워주며 명절과 머슴 생일이라는 백중날 옷벌이나 해 입히며 부리던 어린 꼴담살이가 하는 허드렛일도 농가에서는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풀을 베는데도 두엄을 만들 풀은 거친 산야초를 쇠꼴은 독초가 섞이지 않은 부드러운 풀을 가려 베었다. 타작마당 박힌 잔돌을 건드리지 않고 쓸어야 도리깨질에 돌이 섞이지 않는다. 물지게는 무거워도 가득 차게 져야 오히려 걷기 쉽고 물도 덜 흘린다는 걸 상머슴 중머슴에게 배운다.

머슴들이 서로 이끌고 배우며 깜냥에 맞게 손발을 맞추어 일하는 집은 곳간이 미어터지고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는다.

상머슴이 들일은 제쳐두고 행랑채 문짝이나 고치고 새끼나 꼬고 앉았거나 중머슴이나 꼴담살이가 논갈이 한다고 쟁기 지고 나서거나 용마름을 엮자고 덤비면 어떻게 될까. 논둑은 무너지고 씨앗 묻을 자리는 쑥대밭이 될 것이며 쟁기 보습과 써렛발은 부러지고 지붕에는 물이 샐 것이다.

상머슴을 고르는 대선을 치르고 돌아서니 지방선거가 코앞이다. 거리거리 알록달록 옷차림에 숫자와 이름을 미리 써 붙이고 앞뒷면 빼곡한 명함을 건네며 코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힌다.

오래된 유행가 가사처럼 장갑 낀 하얀손을 흔들며 입가에는 예쁜 미소 지으며 이러저러한 일을 해내겠노라 목청을 높인다. 너도나도 주인을 섬기는 머슴이 되겠다는 이들의 외치는 공약을 들어보니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말들이 사태가 났다.

시의원 후보가 국회 차원에서 의논할 일을 당장에라도 처리할 듯이 말하는가 하면 시장 후보가 대통령조차 못 할 일을 해내겠다 호언장담한다.

국회의원이 나라 사람을 위한 법을 만들고 고치며 나라 살림을 허투루 사는지는 살피지 않고 표 거지가 되어 제 지역구 시시콜콜한 일이나 처리하고 다닌다면 꼴같잖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방의회 의원이 시정이나 도정을 살피며 발품 팔아 마을 공동의 이익을 챙기고 민원을 들어주는 일에는 내몰라라 하면서 당이나 중앙 정치 무대에 연줄이나 대어 보고자 신발 굽이 닳아빠지게 쫓아다닌다면 그 또한 끓지도 않고 넘친 격이다.

상머슴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제 깜냥에 맞는 일을 하면서 인정을 받고 어깨너머로 배우면서 경륜을 쌓아야만 제대로 된 일군이 될 수 있다. 찬찬히 들어보고 중머슴 같은 중머슴, 꼴담살이 같은 꼴담살이를 들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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