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정 수필가
강미정 수필가

수업을 마치자 수강생 한 분이 나를 살짝 당기더니 작은 손가방 속에서 비닐 팩에 싼 노란 꽃송이를 건넨다. 눈웃음으로 감사를 표하자 내 귀에 대고 "메리골드 꽃차예요. 선생님만 드세요."하신다.

바쁜 일정들로 시간과 다투다 보니 차를 마실 여유가 없었다. 며칠이 지난 뒤 복잡한 일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차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노란 꽃차가 떠올랐다.

커피포트로 끓인 물을 투명 유리잔에 부으면서 어떤 향일지 어떤 맛일지 은근히 기대가 됐다. 두 송이만 넣으라고 했지만 물이 조금 많은 것 같아 세 송이를 넣고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뜨거운 물에 잠긴 꽃송이는 화들짝 놀란 듯 잎을 열면서 서서히 물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한다.

뜨거운 물에 불린 꽃송이들이 아주 느리게 물 사이를 유유자적하며 꽃잎을 펼치는 모습이 참 예쁘다. 더운 김을 내는 투명한 물 컵이 노랗게 변한다. 속이 훤히 보이는 유리잔의 색깔마저 바꿔놓았다. 뜨거운 김과 함께 그윽한 향이 퍼진다.

금잔화로 알고 있는 메리골드 차는 시력에 좋다는 얘길 해주셨다. 십여 년 전 라섹 수술을 하고 좋은 시력을 자랑하던 내가 지천명이 되면서 오선 악보를 자주 보는 일을 하는 것도 시력에 해로운 데다 즐겨하던 미싱질이나 캘리그라피가 얼마나 내 시력을 저하시켰는지 실감하는 즈음이다.

시력에 좋다는 말에 메리골드 차를 자주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송이 한 송이 흐트러짐 없는 꽃송이들을 깨끗이 씻어 며칠을 말렸을 텐데 비닐팩 한가득 챙겨주신 바싹 마른 노란 예쁜 꽃을 보니 벌써 시력이 2.0이 넘는다는 소머즈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며 흐뭇한 마음이다.

금잔화의 효능은 참 많기도 하다. 노화 방지·항산화작용·입냄새 제거·수족냉증 개선·여성호르몬 보충으로 인한 갱년기 증상 완화까지 여자들에게 꼭 필요한 건 다 가지고 있는 이 꽃은, 살아 피어서는 색으로 눈을 즐겁게 해주고 향으로 코를 기분 좋게 하다 생을 다하고 나면 말려져 이렇듯 사람에게 좋은 차가 되어주니 참 고맙기 그지없다.

금빛 술잔을 닮았다고 금잔화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보는 시야는 같은 것인지 예쁜 금빛 잔이 둥둥 떠다니는 듯 환상적이다.

사람도 살아가면서 향도 좋고 보기에도 좋았다가 죽어서도 좋은 모양새로 기억에 남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꽃차를 한 모금씩 음미해본다.

얼마 전에도 수업 후 꽃차 공부를 하신다는 분께서 수강생들을 위해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준비해 구절초 꽃차를 한 잔씩 나눠주셨다.

꽃차의 맛도 맛이지만 꽃송이만 뜨는 꽃차와 달리 가느린 줄기까지 한 송이가 그대로 물속에서 피어있던 모습을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청초해 보였고 아련해 보였다. 산에 들에 피어서도 감성을 자극하던 그 꽃이 생명을 다하고 나서도 아름다운 자태로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자꾸 쳐다보게 만드는 차였다.

요즘 들어 건강을 생각하시는 분들이 탄산이나 에너지 음료나 커피 대신 꽃차를 많이들 즐기신다고 한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차가워진 손가락이 따뜻한 투명한 잔을 감싸며 목을 타고 넘어가는 꽃향기가 온기까지 더해져 잔잔한 행복감이 조금씩 차는 듯한 느낌이다.

코로나로 인한 긴장감에 수업이 끝나면 바로 헤어지기 바빴다. 모여서 차 한 잔씩 나누며 건강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각자의 일들에 품앗이도 찾고 약속을 만들고 무언가 계속 되어지는 우리의 이런저런 모습들이 참 오랜만의 정겨움이다. 꽃차 덕분이다.

꽃차로 인한 내 감성은 오랜만의 여유와 함께 많은 좋은 생각들을 가져다줘서 행복했다. 그 행복한 마음을 고스란히 나를 찾아오는 지인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어 투명 유리잔을 주문했다.

투명 유리잔으로 마셔야 꽃차가 주는 느낌이 배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노란 메리골드 차의 향과 맛이 쌀쌀한 초겨울을 따스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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