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영 시인
김무영 시인

지난 22일은 김영삼 대통령 서거 6주기였다. 대통령에 취임하는 날 청와대 앞길과 뒷산 인왕산을 개방했다. 비리의 온상이었던 안거를 철거하고 하나회를 없애 군 기강을 바로 세웠다. 공무원 재산등록, 혁명보다 더 힘들다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해 지하에서 유통되는 경제 흐름을 실명으로 끌어올려 건전한 금융 질서를 바로 세웠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민주당 경선에서 1위를 하고도 과반 득표가 되지 않아 결선투표에서 김대중에 밀려 후보가 되지 못했으나 후보를 적극 지지하며 선거운동을 도왔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때도 정권을 비판하며 김대중 구출에 나서기도 했다.

김영삼은 거제지역구에서 27세로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고, 38세에 원내총무가 됐으며 1967년 신민당 창당 때도 원내총무를 맡았다.

이듬해 모친인 박부연씨의 기일이었으나 폭풍이 일어 여객선이 출항하지 않게 되자 마산에 있는 부친의 멸치잡이배를 타고 거제로 오던 중 해경에 적발돼 참석하지 못할 처지였으나 사정을 안 해경경비정으로 올 만큼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다.

생전에 어머니는 생면부지의 가정에서 출산했다는 소식만 들어도 미역과 쌀을 보냈을 정도로 정이 깊었다. 특히 1960년 선원들 월급날에 무장공비 두 명이 부친 김홍조 옹을 찾아와 돈을 내놓지 않으면 총으로 죽이겠다고 했다.

이에 부친은 '이 돈은 선원들 몫이라 줄 수 없다'고 하자,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모친인 박부연씨가 가로막아 총에 맞아 사망하고 부친은 간신히 목숨을 구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로 모친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이 더욱 깊어져 기일 날은 거제를 찾았으며 모친의 묘소도 생가에서 빤히 보이는 곳에 설치했다.

야당 총제시절인 1979년 가발수출회사인 YH무역의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 당사에 찾아와 농성에 돌입했다. 경찰이 강제 진압했다. 당수인 김영삼을 가택연금 시키고 신민당 총재직도 정지시켜 의원면직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때 '닭의 모가지는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야당 총재시절 기업체에서 정치기부금을 가져오면 당수인 김영삼은 당 사무처에 보내 처리하게 했으며 자신이 직접 면담하고 받는 일이 없었다 한다.

대체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돈에 대해서는 욕심이 없었으며, 부친인 김홍조 옹은 '다른 자식들은 대학까지 보내면 부모들에게 용돈도 보내주고 하는데 우리 자식은 선거할 때마다 배를 한척씩 팔아야 하니 다른 집 자식들이 부럽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국민들은 대부분 손가락질을 했다. 대통령에 당선되고 2년에 걸쳐 지지율이 80%를 웃돌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해 투명한 경제를 만들었는데도 3년차부터 지지율이 하강했으며, 재임 중임에도 잘못한 자신의 아들을 구치소에 갇히게 했다.

1997년 여름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태국·필리핀·홍콩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연쇄적인 외환위기는 그해 가을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쳐 결국 그해 11월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동남아로부터 시작된 금융위기가 마치 당시 정부의 탓으로 되면서 임기를 마친 후에도 비난이 이어졌다.

그리고 사망하고 상중에서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조명되고 업적이 빛을 내고 있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인기가 폭발하듯 치솟아 장목 대계마을 생가는 연일 관람객으로 넘쳐 났다. 비가 새고 재래식 화장실에서 냄새가 진동해 민원이 끊이지 않아도 김영삼 대통령은 '그대로 두라'고 했고, 차량으로 아수라장이 된 도로도 '넓히지 말라'고 할 만큼 자신과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욕심이 없는 천상 거제인이었다.

대도무문(大道無門·큰 깨달음이나 진리에 이르는 데에는 정해진 길이나 방식이 없음)이라고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거산 김영삼은 목숨을 걸고 불의와 싸우는 그래서 대한민국에 정의가 살아 숨 쉬게 하는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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