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김계수 칼럼위원

언제나 바닷가에 나서면 하얀 포말로 왔다가 일그러졌다가 용솟음쳤다가 미련 없이 세상을 등지는 파도 보는 것이 좋았다.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숱하게 파도를 끌어안았다가 미련 없이 놓아주는 단단한 절벽 속의 울음을 듣게 되었다.

벽의 가슴마다 몰아치는 파도와 바람으로 생의 울음을 거칠게 새기었다. 파도의 힘센 근육질의 손바닥 끝으로 바위를 때려대는 휘청거림으로 생의 중심을 잡아 온 절벽이다. 벽의 중심이 내는 고요함과 파도의 성난 호흡을 다시 가라앉히며 되돌려 보내는 평온함이 보인 것일까.

떨어진 꽃잎에 나비가 앉아 울지 않듯이, 지난 계절이 갑자기 내 앞을 앞질러 갈 때 느끼던 서운함 속엔 온도가 없다. 그러나 절벽은 다시 파도를 불러 세워 자신의 거친 온기를 속으로 다듬는다. 내 연약한 마음이 들어 설 자리가 없다.

아픔은 대체될 수 있는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의 질량은 가늠한 것일까? 니체가 도달하고자 했던 ‘위버멘쉬’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잠시 어느 한때라도 가능한 일이었다면 사람은 왜 끊임없이 아파하고 괴롭고 힘들어하는가! 파도의 부딪힘을 견디는 것으로 절벽은 가슴에 삶을 표기하고 있었던 것인이다. 그렇다면 삶은 고통인데, 그럼 파도는 행복한 무엇인가.

세상에는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가치가 있는데 이를 저버리면 흔히들 ‘네가 사람이냐?’라는 말로 비판한다. 이 비판은 기본적인 인간적 가치를 저버린 행동, 즉 최소한의 도덕적 정의를 저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 인간의 정의나 도덕이 권력이나 물질 앞에서는 수없이 무너져 왔다. 바람에 떠밀려 방충망 그물 사이사이에 끼어 마른 사체들을 볼 때마다 인간이 만든 거대한 권력구조 앞에 이처럼 목숨을 던져야 했던 피지배자들이 생각나는 것은 과대망상일까. 지하철 청년 근로자가 부딪혔고, 청소 노동자가 부딪혀 소리했고, 비정규직, 택배 노동자들이 여러 번 비인간적인 덩어리에 부딪혀 죽어갔다.

남은 우리는 마른 사체를 죽은 자리에 꽃으로 치장하고 함께 울어주는 시늉을 해왔다. 피지배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가치적인 일은 ‘우리도 사람이다!’ 한 마디 외치는 것이다. 이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은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해 왔다. 훼손된 휴머니즘은 되살려졌을까? 과연 지금은 자본의 승리인 시대인 것일까?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하자는 운동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인간의 능력이 극대화된 세상이 아니고 무작정 자연주의로 돌아가자는 생태주의 주장도 아닌 사람과 기계가 공존할 수 있되 사람과 꽃이 서로의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세상이 더 합리적이다.

극한의 주장은 극한의 대립을 낳고 함께 파멸된다. 권력이 권력만을 유지하려 하고 자본이 자본을 지키기에만 급하면 지하철 청년 노동자, 비정규직, 일용노동자의 힘이 어린 사람들처럼 속으로 우는 사람들의 마른 사체가 결국 자본과 권력의 숨통을 조일 것이다.

파도와 절벽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결과로 인간에게 감흥을 주기도 한다.

인간이 사물이 되기도 하고 사물이 인간을 대체 가능한 참 희한한 세상에서 내가 파도가 될 수 없고 또한 절벽이 될 수 없으니 아픈 사람들의 외침에 속울음을 운다.

인간과 기계와 꽃과 비와 바람과 햇살이 서로 접속하고 접촉하여 변화시키고 변화되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눈물이 차지할 곳이 좁혀져 간다. 인간과 기계와 자연의 접촉으로 무분별해진 영역 확대의 결과가 ‘코로나19’다.

‘기후위기’와 마찬가지로 ‘코로나19’와도 공존의 대상이며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감히 눈물이나 흘리고 있을 여력이 사라지고 있다. 인간만이 힘이 아니다. 가을에 피는 코스모스의 아름다운 꽃잎을 보며 인간을 위한 도구로만 보고자 했다. 꽃잎에 내장되어 있는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어떤 힘에 의지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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