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창수 칼럼위원

▲천창수 송진교회 목사
월남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미국 중서부 어느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한 가정에 전화가 걸려 왔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아들이 귀국해서 부모님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마침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놓고 애를 태우던 어머니에게는 꿈만 같은 전화였다. 서로 안부를 확인한 다음 아들이 이야기를 계속한다.

“어머니, 친구를 하나 데려왔습니다. 친구는 몹시 다쳤는데 갈 집이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살았으면 합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하려므나.”

“어머니 그런데 친구는 눈 하나, 팔 하나, 다리 하나가 없습니다. 전쟁터에서 눈 하나, 팔 하나, 다리하나를 잃었습니다.”
“그래 네가 좋다면 당분간 우리와 함께 살도록 하자꾸나.”

“어머니 당분간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친구인데 어디 갈 곳이 없습니다. 한평생 같이 살았으면 합니다.”
“그건 안된다. 그 애는 몸이 그렇게 부자연스럽다며. 한평생 같이 산다면 네게나 우리에게 얼마나 큰 짐이 되겠느냐?”

전화는 거기에서 끊어졌다. 아들은 다음날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에게는 전보 한 통이 날아왔다. 아들이 호텔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아들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 어머니는 아들의 시신을 보고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대성통곡했다.

아들이 바로 외눈에 외팔에 외다리였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이러한 모습으로 집에 들어가는 것이 어머니에게 짐이 되지 아니할까 고민을 하다가 친구의 이야기를 지어내어 어머니의 마음을 떠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사랑을 안다고 생각한다. 또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사랑을 모르고 있고 사랑을 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했다. 사랑으로 키웠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이 자녀가 성장한 다음에 부모를 미워하고 원망한다. 언제 나를 사랑했냐고 한다. 부모는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랑이 소통되지 못했고, 자녀는 사랑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했다. 극진히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쉽사리 남편을 나쁘다고 단정 지어 버린다.

하지만 내 사랑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사랑이 소통되지 못했고, 어쩌면 사랑하고 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사랑하고만 있다면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사랑이 없기에 나약하고, 사랑이 없기에 괴롭고, 사랑이 없기에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랑이 나 중심의 이기적인 사랑이었기에, 사랑이 소통되지 못하고 언제 나를 사랑했냐고 하는 것이다. 이제는 사랑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 세상적인 지식들을 가지고 사랑운운 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

성경은 자기중심적이요, 자기욕구, 자기감정을 넘어서지 못하는 본능적인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욕망의 포로가 됨으로서 자유를 오히려 마비시키고 마는 그러한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사랑을 새롭게 배워가야 한다. 그래서 새롭게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사랑의 그 신비로운 능력 또한 새롭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귀한 말씀이다. 오늘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여러 삶의 현장에서 사랑이 소통되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봄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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