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휩쓴 지심도…다크투어리즘 명소로 거듭나야
일제가 휩쓴 지심도…다크투어리즘 명소로 거듭나야
  • 거제신문 기획취재단
  • 승인 20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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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다크투어리즘2]일제 군사요충지 지심도와 천주교 순례자의 길
박해 받던 순례자 길…복음 전파 성지로 이어져
일제강점기 군사요충지 흔적 고스란히 남아
천연 자연경관 접목…역사교육·관광자원 활용
거제 지심도 동백숲 모습.
거제 지심도 동백숲 모습.

#지심도

일제강점기 군사요충지로 강제로 수용된 비운의 섬 지심도. 그 섬의 절절한 아픔을 찾아 떠나는 다크투어리즘은 또다른 묘미가 있다. 아픈 역사 이면에 국내 최고의 자연경관과 동백 원시림을 만끽할 수 있는 힐링의 섬이기도 하다.

지심도는 거제시 일운면 옥림리에 딸린 섬(면적 33만8609㎡·해안선 길이 3.5㎞)이다. 장승포항에서만 배로 왕래할 수 있었지만, 올해부터는 지세포항에서 오가는 도선이 생겼다. 장승포항이나 지세포항에서 뱃길(도선)로 15분여면 닿는다.

지심도는 멀리서 보면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숲으로 보일 만큼 각종 수목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으며, 섬 전역에 걸쳐 후박나무·소나무·동백나무·팔손이·풍란 등 37종에 이르는 수목과 식물들이 자란다. 전체 면적의 60~70%를 동백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굵기가 팔뚝만한 것부터 아름이 넘은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크기의 동백나무들이 빼곡하게 자생하고 있어 지심도라는 지명보다는 '동백섬'이라 불린다.

문헌에는 조선 현종45년에 15가구가 이주해 살았다고 남아 있다. 1936년 한일 합방으로 주민들이 강제이주하게 됐고 그 이후 일본군 요새로서 1개 중대가 광복 직전까지 주둔했다. 해방이 되면서 주민들이 다시 이주해 현재 15가구 21세대 36명이 밭농사·과수원(밀감·유자)·민박  등으로 생활한다. 섬 주변에는 해식애가 발달했다.

#일제강점기 군사시설 지심도

한려해상국립공원 자연환경지구로 지정된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군사시설로 쓰였다. 지금도 곳곳에 일제 흔적이 남아 있다. 해방 후 국방부가 섬을 소유하다가 2005년부터 거제시는 지심도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고 80여년이 지난 2017년에 다시 거제시가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현재는 거제시가 섬 주민 전체 이주와 함께 자연 생태 학습장 조성을 위한 용역을 진행 중이며, 명품섬으로 만들어 관광자원화를 꿈꾸고 있다. 그러나 이주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반발로 갈등의 골이 깊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지심도 탐방 코스는 선착장-동백하우스-마끝-일본군 소장사택-지심분교-포진지-운동장-곰솔할배-서치라이트보관소-해안선전망대-망루-동백꽃길-선착장으로 이어진다. 선착장에 발을 내딛으면 인어아가씨 동상이 공손히 인사를 하며 반겨 준다. 일제강점기 때 건설된 이 선착장은 당시 일본군 1개 중대의 식량·군수물자·포대 신축을 위한 자재 등의 수송을 담당하던 곳이다.

지심도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 중 '포진지'
지심도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 중 '포진지'

일본의 지심도 요새화는 일제강점기 절영도 남단부터 대마도 북단의 우니지마까지의 해상 48㎞에 대구경 화포의 포대를 구축했다. 대한해협을 제압하는 동시에 일본·한국 양쪽의 해상수송을 유지하며 함선을 엄호하는 업무를 맡았다. 당시 지리적으로 '지심도-이키(오오지마)-쓰시마(쯔쯔자키포대)'를 하나로 묶는 노선은 한국과 일본을 하나로 연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노선으로 지심도는 지정학적으로 대한해협을 제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선착장에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처음 만나는 '동백하우스'라는 건물이 보인다. 이 동백하우스는 일본군 중대를 지위하던 중대장 관사였다. 현재는 개·보수를 거쳐 지붕과 기둥을 제외하고는 예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인근의 또다른 건물들도 증·개축을 했지만 외형은 옛 건물 그대로다.

지심도 남쪽 끝 '마끝'에 도착하면 절벽 위로 해송·고사목이 에메랄드빛 바다와 맞닿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다. 마끝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쥐의 주둥이를 닮았다고 해서 불리는 서이말이 보인다. 서이말에는 남동해에서 가장 큰 등대가 있다.

지심도 마끝.
지심도 마끝.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 보면 담수정화시설을 만난다. 일제강점기 때 무를 담가 단무지를 만들던 곳이다. 지금은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없지만 아래 건물은 일본군 배급소로 사용됐고, 병사들의 식사 배급을 담당했던 곳이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펜션이 나온다. 1936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헌병분주소'다. 증축은 했지만 남아있는 기와는 일제강점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길을 따라 더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폐교는 현재 마을회관으로 사용된다.

폐교를 지나면 국방과학연구소가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갈림길이 시작된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일제 잔재가 남아있는 포진지와 탄약고가 나온다. 반대쪽으로는 '샛끝'이라 불리는 지심도 동쪽 끝이다.

지심도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 중 서치라이트 보관소
지심도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 중 서치라이트 보관소

포진지 쪽으로 걷다 보면 바닥에 인공이 가미된 돌들이 보인다. 레일을 깔아 포를 옮겼던 흔적들이다. 포진지로 가는 길에 무성한 소나무들은 일제강점기 때 위장용으로 심은 나무들이다. 지심도 포대의 주요업무는 대한해협의 경계 및 함선 엄호였다. 포대에 설치된 무기는 45식 15㎝ 캐논포(개조고정식)였다고 한다.

포진지는 네 개가 있는데 아주 견고하게 만들어져 지금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첫 번째는 탄약고 입구와 이어져 있다. 탄약고는 지형을 이용해 견고하게 만들어졌고 진동을 막기 위해 문틀에 홈을 만들어 납을 넣어 뒀다고 한다. 이 탄약고는 첫 번째와 두 번째 포진지 사이에 있다. 정문이 부산을, 후문은 쓰시마 방향을 향해 있으며 양쪽 입구가 포대를 향하도록 했으며, 내부에 철문으로 설치됐던 2개의 포탄 보관실이 있다.

출입구는 침수에 대비하기 위해 바닥이 약간 높고 탄약 공급이 쉽도록 배치돼 있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철문이 있었고 문틈이 이중으로 굴곡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내부를 완전히 밀폐시킬 수 있도록 한 듯하다. 문틀을 보면 철문의 두께를 추측할 수 있으며, 배수시설이 잘돼 있어 탄약고는 깨끗하게 보존돼 있다. 현재 탄약고 내부는 지심도의 역사를 설명하는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심도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 중 탄약고 내부 모습.
지심도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 중 탄약고 내부 모습.

탄약고를 나오면 두 번째 포진지를 만날 수 있는데 진지 주변은 대나무들이 무성하다. 포의 진동으로 인해 지반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군이 심은 대나무라고 하며 습기로부터 탄약고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으로 수로가 연결돼 있다.

세 번째 포진지는 배수시설과 견치식으로 쌓은 축대가 보인다. 여기도 지형을 이용해 견고하게 만들어진 별도의 탄약고가 있다. 내부는 개방돼 있지만 조명이 없어 안을 확인할 수 없다. 길을 따라 돌아가기 전 다른 세 개와 조금 떨어진 비탈 아래쪽에 네 번째 포진지를 찾아 들어갔다. 견치식으로 쌓은 축대와 배수시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형을 이용해 만든 탄약고를 볼 수 있다.

발길을 돌려 걷다보면 해맞이로 유명한 헬기장이 있는데 섬의 유일한 평지이자 전망이 좋은 포트존이다.

북쪽 해안선 전망대로 가는 길이 온통 동백터널을 이루고 있다. 수령이 많은 해송이 바다를 바라보며 동백숲을 지키고 있다. 이곳은 3월이면 흐드러지게 핀 동백들이 시들지 않은 채로 통꽃으로 뚝뚝 바닥에 떨어져 붉은 카펫 길을 만들며 절경을 이룬다.

조금 더 가다보면 대한해협의 경계와 함선 엄호를 위해 만든 서치라이트 보관소가 나온다. 대나무가 무성한 맞은편에 자리한 창고가 바로 일본군이 서치라이트를 보관하던 곳이다. 조명이 도달하는 거리가 7~9㎞나 될 만큼 커다란 서치라이트를 방향 지시석으로 끌고 가서 사용했다고 한다. 이중벽 형태로 만들어진 보관소는 내·외벽 사이에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을만한 공간이 있다. 문은 오래된 채로 고정돼 있고 두꺼운 철문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곳을 지나면 서치라이트를 사용했던 주요 요새의 방향을 확인해 정확하게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향지시석이 나온다. 언뜻 보면 그냥 지나칠 정도의 부서진 작은 돌조각이다. 총 6개의 지시석이 있었으나 지금은 장승포·가덕도 등대(가덕도 외양포 포대)·절영도(부산 영도 절영도포대)·쓰시마 남단(쯔쯔자키포대) 등을 나타내는 5개만 남아 있다.

다음으로 만나게 되는 장소가 해안선 전망대다. 마치 조각처럼 깎아서 만든 듯한 해식절벽의 멋진 경치에 자연스럽게 발길이 멈춰진다. 이곳을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면 태극기 게양대가 나온다. 지금은 태극기가 게양돼 있지만 일제강점기 때에는 침략의 상징이었던 욱일승천기가 게양됐던 한이 스린 곳이다.

돌아가는 길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전등 소장 사택을 만나게 되는데 카페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영업을 안한다. 일본식 기와와 지붕의 경사가 일제강점기 건물임을 알려주고 있다. 

거제섬&섬길 7코스인 천주교 순례길 중 '명상의 길'
거제섬&섬길 7코스인 천주교 순례길 중 '명상의 길'

순교자 현양비...죄인에게 씌우던 형틀인 칼을 형상화

지세포에 도착해 거제섬&섬길 7코스인 천주교 순례길에 들어섰다. 순례길 중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예구마을 선착장에서 벧엘수양관 삼거리 구간을 택했다.

예구마을로 들어가면 천주교 순례길 표지판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천주교순례길은 조선시대 후기에 거제에서 포교활동을 하다 박해로 순교한 윤봉문(요셉) 복자를 기리는 길이다. 거제조선해양문화관에서 출발해 예구마을로 걷다보면 성지 입구에 '천주교 순교자 윤봉문(요셉) 지묘'라는 3m여의 낡은 자연석 표지석을 만난다.

표지석을 지나 마리아상과 순교자 현양비·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가 하늘 높이 솟아있는 광장에 들어섰다.

이곳에서부터 순례자의 집-편백나무 숲인 명상의 길-순교자의 탑-십자가의 길-대나무 산책로 등으로 천천히 걸어 한 바퀴 돌았다. 순례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복음 씨앗이 처음으로 거제도에 떨어진 것은 병인박해 직전으로 리델신부와 목사였던 순교자 구한선 타데오가 거제도 전교를 위해 다녀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 순례길 중 순교자의 탑
천주교 순례길 중 순교자의 탑

그 후 병인박해 중인 1868년경 윤사우가 거제도로 들어왔다. 그는 할머니의 입교로 가족 모두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윤사우의 가족은 양산 대정에 숨어 살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신앙생활이 비교적 자유로운 대마도로 피신할 목적으로 거제도에 정착하게 됐다고 한다.

둘째 아들이었던 윤봉문은 형인 윤경문과 함께 거제도에서 신자를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쓰다가 37세로 순교했다. 그의 유해는 진목정 쪽박골(현 옥포) 선산에 안장됐다.

거제도 신자들은 1978년 9월 윤봉문 요셉 순교 90주년을 맞이해 순교자의 무덤에 순교 기념비를 세웠고 거제와 통영지역 본당들은 현양·성역화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선산이 다른 사람 소유로 넘어가 묘소를 이장할 필요가 제기돼 2013년 4월20일 순교자 윤봉문(요셉) 유해를 옥포에서 지세포리 산103-12인 이곳 순교자 현양비 뒤편에 모셨다.

윤봉문(요셉) 순교자는 2014년 8월16일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으로 광화문에서 열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식에서 시복돼 복자의 반열에 올랐다.

천주교 순례길 중 요셉 묘소.
천주교 순례길 중 요셉 묘소.

성지가 된 이곳은 본래 서울 대교구가 마산교구에 기증한 곳으로 길도 없었던 산속을 신자들이 직접 나무를 베고 길을 만들었다. 십자가의 길과 목주기도 길을 조성하고 중앙에 순교자 현양비도 건립했다. 순교자 현양비는 죄인들에게 씌우던 형틀인 칼을 형상화한 것이다.

선교자 윤봉문이 떠난 후 형인 윤경문은 공곶이에 머물며 천주교 교리 전파에 힘을 쏟았다. 천주교 묘지가 즐비한 산등성이에서 느끼듯 이곳이 천주교 전래의 산역사지다.

공곶이는 땅이 바다로 툭 튀어 나온 곳을 곶(串)이라는데 공은 거룻배 공(鞏)을 써서 공곶이라 했다. 1970년경 마제석검과 돌도끼가 발견되고 내도에서는 패총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한 지형적 특성으로 물고기와 해조류가 많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 천주교 탄압 때 피난한 천주교 관계자들이 숨어들어 살면서 이 지역 토착주민들과 혼인해 정착한 것으로도 보고 있다.

거제섬&섬길 7코스인 천주교 순례길 중 공곶이 가는 길.
거제섬&섬길 7코스인 천주교 순례길 중 공곶이 가는 길.

1957년 천주교 신앙심이 강했던 부모님이 맺어준 인연으로 진주총각 강명식과 예구마을 처녀 지상악이 결혼해 공곶이 산봉우리로 산책을 나와 때묻지 않은 수평선과 아름다운 자연에 '내가 살아야 할 이상향(파라다이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공곶이 수선화 천국의 시작이었다. 공곶이에는 수선화를 비롯해 종려나무(영화 '종려나무 숲' 촬영지)·수선화·조팝나무·동백·팔손이·등나무 등과 꽃만 해도 500여종 4만평이 넘는 천상의 수목원이다.

봄이 되면 이곳은 꽃의 바다가 된다. 수선화와 동백, 새하얀 조팝나무가 쪽빛 바다와 어우러져 절경을 펼치고 설유화도 함께 몸매를 자랑한다. 오지였던 탓에 거제시민들 조차도 별로 발길이 잦지 않았으나 종려나무숲 영화와 수선화가 알려지면서 이곳은 명소 중의 명소가 됐다.

천주교 순례길 중 공곶이
천주교 순례길 중 공곶이

노부부는 농기계 대신 호미와 삽·곡괭이로 거친 땅을 옥토로 만들었다. 그 덕분으로 자연미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공간으로 보존되고 있다.

공곶지에서 예구마을로 들어섰다. 이곳은 고종 26년(1889년) 한일어업협정으로 일본어선인 예인선이 들어와 정박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 이름은 왜구·왜구미·왜기미·예금이라고도 했다. 와현리 망산(해발 303m) 정상에 위치한 봉수대는 조선시대 수군의 주둔지였던 지세포진에 속해 있었다. 산의 정상부를 다듬은 뒤 방호벽을 쌓은 원형의 단봉이다. 규모가 매우 크고 계단시설이 잘 남아 있다. 북으로 지세포봉수대-옥녀봉봉수대-강망산봉수대와 연결된다.

천주교 순례길 중 공곶이
천주교 순례길 중 공곶이 해변
천주교 순례길 중 와현모래숲해수욕장.
천주교 순례길 중 와현모래숲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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