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독립유공자를 기억합니다"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독립유공자를 기억합니다"
  • 거제시 홍보담당관실 김석규
  • 승인 2020.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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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5 광복 특집】 옥영준 독립유공자 후손 옥명자 할머니
옥영준 독립유공자 후손 옥명자 할머니.
옥영준 독립유공자 후손 옥명자 할머니.

"1945년 8월15일. 대한민국은 지옥과도 같았던 35년 동안의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됐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해방이 지옥이었을 테지만요. 광복절은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 날입니다. 그러나 독립을 위해 희생한 분들은 완전한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당신들이 가진 모든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친 탓에 삶은 비참하기만 했습니다."

제75주년 광복절을 맞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독립유공자 후손을 만났다.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거제도 출신 독립유공자 13명 가운데 거제도에 사는 옥영준(玉英俊·1892년 2월17일~1961년 11월17일) 독립유공자의 딸 옥명자(75·능포동) 할머니를 만나 아버지 옥영준과 독립운동가 옥영준의 이야기를 들었다.

# 애국지사 옥영준의 삶

옥영준 독립유공자는 1892년 2월17일 중조 증(贈) 호조참의(戶曹參議) 죽천공(竹泉公) 신변(信卞)의 11세 손으로 장승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아버지를 따라 만주 환인현(桓仁縣)으로 건너가 1919년 대한독립단에 들어갔다. 1919년 전덕원(全德元)이 대한독립단원 수십 명을 거느리고 국내에 들어와 동지들을 모으고 군자금을 모을 때 함께 활동했다. 자신의 모든 재산과 함께 거금의 군자금을 모아 대한독립단 본부에 전달했다.

그렇게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군자금과 동지들을 모으던 그는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21년 2월9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제령제7호위반'이란 죄목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악랄한 고문과 숱한 수모를 참아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만주로 건너가 군자금을 모으는 등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고향 거제로 내려왔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중국 침술을 배워 동포들의 병고를 돌보며 인술을 베풀었다. 그는 경남 의령이 고향인 남순이 여사를 만주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남순이 여사가 몸이 좋지 않아 만주까지 가서 침을 맞았는데 침을 놓아준 사람이 바로 옥영준 독립유공자였다.

만주에서 아들 둘을 낳고, 거제로 들어온 그는 거제도에서 딸 셋을 낳았다.

그는 자신의 재산과 청춘을 모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에 바쳤다. 그렇게 해방을 맞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일을 할 수 없었던 그의 삶은 비참했다.

거제도에서 16년 동안 가족을 고생시키며 살다가 일흔이던 1961년 11월1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인과 3명의 딸에게 "언젠가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채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1982년 대통령 표창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그는 장승포동 망산에 묻혔다가 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은 뒤 1985년 애국지사 묘소로 정비해 그의 아내 남순이 여사(2002년 작고)와 함께 있다.

유족들은 2024년 옥영준 애국지사와 그 부인의 묘소를 대전 현충원으로 옮길 계획이다

옥영준 독립유공자 후손 옥명자 할머니.
옥영준 독립유공자 후손 옥명자 할머니.

#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살기

옥명자 할머니는 1946년 장승포에서 태어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몸은 고령인데다 일본 경찰의 고문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돼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었다. 가족과 함께 지낼 방 한 칸 없이 이웃들의 '정지방'을 전전긍긍 했다.

집안 생계는 오롯이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일곱 살 때부터 '깨발'을 하며 톳과 홍합을 따서 쌀과 보리쌀 조금을 사서 근근이 배를 채웠다.

오빠 둘이 있었지만 한 명은 6.25 전쟁이 터지면서 보도연맹으로 몰려 도망간 뒤로 생사조차 알 길이 없다. 또 한 오빠는 어릴 적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와 두 여동생을 뒷바라지했다. 동생 둘은 다른 집에서 식모살이하며 겨우 초등학교를 나올 수 있었다. 아버지는 침을 놓아주고 쌀을 조금 얻기도 했고, 아주동 배골과 안골에 있던 아버지의 고종사촌이 주는 쌀과 보리쌀로 겨우 살 수 있었다.

'깨발'로 겨우 돈을 조금 모아 오두막을 하나 장만했다. 오두막집을 사서 가족과 함께 살기시작 한 후 20여일 되던 날 아버지 옥영준은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결혼을 서둘렀다. 그런데 남편마저 몇년 뒤 병을 얻어 앓아누워 생활고는 심해져만 갔다.

어릴 때부터 생계를 위해 시작한 생선 장사는 몇 년 전에야 손을 놓았다.

1982년 아버지 옥영준이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으면서 독립유공자 후손이 됐다.

그러나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5남매의 어머니였다. 아들 수학여행도 못 보내고, 신혼여행도 남들처럼 번듯하게 보내지 못했다. 그래도 지금은 행복하다고 한다. 자식들이 모두 결혼해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어서란다.

# 아버지 옥영준, 애국지사 옥영준

할머니는 아버지를 두 가지 관점에서 말했다.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참 훌륭한 사람, 가족들에겐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준 아버지. 그렇지만 원망할 수 없는 아버지, 훌륭한 분을 원망해서는 안 되겠지."

전 재산을 쏟아부으며 독립운동을 한 뒤 해방을 맞고 돌아온 조국이 아버지에게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지독한 가난만 남은 현실은 절망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할머니는 "내가 어릴 때 엄마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흙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을 봤다"면서 "가난은 정말 무섭다, 진짜 무서운 게 가난이다"라고 했다.

할머니가 걷기 운동하면서 늘 아버지 묘소 근처를 지날 때마다 다짐한다고 한다. "아버지, 어머니 딸로 태어나서 감사합니다. 다음 생에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더 효도하겠습니다"라고.

이 말을 하면서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혔다.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리워서 일게다. "지금은 아파트에서 이렇게 사는데, 얼마든지 아버지, 어머니 잘 모실 수 있는데 세월이 너무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딸들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 언젠가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현실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독립은 그냥 된 것이 아니다. 정치권이 권력만 좇지 말고, 독립운동 하던 애국지사처럼 진심으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다, 꼭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 거제시 출신 독립유공자

남기명(거제면)·권오진(연초면)·박영준(동부면)·옥영준(아양동)·양명복(장승포동)·이인수(아양동)·이주근(아양동)·주종찬(옥포동)·서환수(하청면)·양명(사등면)·신용기(하청면)·반영기(연초면)·진병효(옥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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