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의 일이다. 골동품을 팔고 사는 사람 사이에서 흥정을 붙이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거간꾼 장형수가 친일파 송병준의 손자 집에 갔다. 대개 부잣집에는 값나가는 물건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 밤이 늦어 그 집 사랑에 묵게 됐다.

화장실에 가려고 나왔는데 하인이 군불을 때고 있었다. 그 옆에 불쏘시개로 놓여 있는 종이뭉치 속에 초록색 비단으로 된 책이 한 권 보였다. 직감적으로 이게 뭔가 다르다싶어 살펴보니 표지에 '해악전신(海嶽傳神)'이라고 쓰여 있었다.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이 72세 때 금강산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동해안 일대의 명승지 그림 21폭과 서문·시문·발문까지 모두 38폭으로 구성된 완전한 화첩(畵帖)이었다.

장씨는 송병준의 손자에게 어차피 불쏘시개 하려던 것이니 자기에게 팔라고 청해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인 20원을 주고 샀다. 그렇게 구입한 겸재의 화첩을 간송(澗松) 전형필 선생에게 가져가 200원을 불렀는데, 간송은 좋은 물건은 거기에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 한다며 무려 1500원을 줬다.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을 수집할 때도 서울에서 괜찮은 기와집 한 채 값인 1000원을 불렀는데, 간송은 무려 10배가 되는 만원을 주고 구입한 적이 있다. '해악전신(海嶽傳神)'첩은 2017년 12월에 보물 1949호로 지정됐다.

지난해 11월12일 영국 언론에서는, 청나라 6대 황제인 건륭제 때 제작된 배 모양의 찻주전자가 경매에 나와 우리 돈 약 15억6000만원에 낙찰됐다고 보도했다. 이 찻주전자는 어느 평범한 가정집의 선반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던 물건이었다. 골동품 감정사가 우연히 이 집을 방문했다가 발견한 것이다. 주인은 물건값으로 우리 돈 150만 원을 받고도 좋아했는데, 무려 그 가격의 1000배가 넘는 가격으로 팔린 것이다.

진가를 알아보는 '눈'을 가지지 못하면 보물도 불쏘시개가 될 수 있고, 선반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천대받는 물건이 될 뿐이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