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담 스님/금수사 주지

종교란 현실의 낮은 곳(俗)에서 높은 곳(聖)으로 지향하는 인간들의 삶의 기준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종교처럼 무조건 선택된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열심히 절대자에게 복종하며 무조건 기도만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편협된 종교관이 아닐까?

이 현실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사바세계라 한다. 흔히들 말하는 속세, 즉 사바세계란 생명을 가진 중생들이 모든 악을 참고 견디며 살아가야 된다고 하여 감인세계(堪忍世界)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불교에서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즉 자기 자신이 부처이며 이 현실이 극락세계인 상적광토(常寂光土)에서 생활하지만 중생들 각자가 극락세계에 사는 부처인줄 모르고 미혹과 성내고 탐하고 욕망에 물들어 모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미혹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이것을 불교에서는 인연법을 깨치면 두두물물이 참 생명이며 처처가 안락국이라 가르친다.

흔히들 말하는 신의 사랑에서 구원되며 부처님의 자비심에서 생로병사가 구제된다면 왜 이 현실에 많은 중생들이 고통에서 헤매는가.

전지전능한 신과 자비의 화신인 부처님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인간 즉 중생을 구제·구원하는 것은 부처도 신도 아니며 자기 교단이 신성시하는 경전도 아닌 것이다.

인연법을 깨치는 근본적인 것을 반야지혜라 한다. 자기 자신을 구제·구원하는 원천적인 힘이 반야지혜에서 나온다면 어떻게 해야 반야지혜를 체득할 수 있을까?

이것을 팔만대장경의 종류가 많지만 대장경의 거의 반 가량 되는 반야경에서 설하기를 사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버리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반야지혜이다.

불교는 자각의 종교, 지혜의 종교이다. 즉 전지전능한 신은 어디에 있으며 부처가 어디에 있는지 반야의 지혜를 살펴봐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불교가 그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먼저 개인 혹은 집단을 막론하고 각자 스스로가 자신을 구제하고 욕망과 탐욕에 물든 개개인을 원력과 구도적인 문제의식을 자각했을 때만이 비로소 자신을 새로운 차원에서 지혜를 발휘할 수가 있다.

반야의 지혜는 신이나 부처님이라는 어떤 신앙의 대상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간접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가 경전·어록을 읽고 불법의 대의와 정신, 사상, 인격, 자비심을 배워 보살행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자각적인 지혜로 만드는 길을 분명히 제시해 준다.

반야지혜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중생 각자가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고 자신의 삶을 깨닫도록 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반야지혜를 체득함으로써 부처님과 같은 지혜와 자비를 실천할 수가 있다.

반야지혜는 수많은 염불과 경전과 어록을 읽고 불법의 정신을 체득하고 역대 조사스님들의 지혜를 배우는 일에서 시작해야 된다.

반여지혜는 일체의 불안과 근심, 욕망에 찌든 사람에게 미혹을 잘라내는 지혜의 칼이다. 아무리 불법의 정신, 사상, 보살행, 자비를 잘 알더라도 지금 현실의 삶에서 자각적인 지혜가 되지 않으면 반야지혜는 죽은 지혜인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지혜라도 제때에 작용, 혹은 활용하지 못하면 쓸모없는 것이다.

반야지혜는 인간 존재의 근거이고 자연적인 신체를 중요시 하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지혜의 당체이다. 따라서 인간을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한 개인의 본질적인 자기 자신의 문제로 삼고 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인간을 신에게 종속시키려는 중세 종교적 세계관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그러한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각자의 반야지혜를, 해결 할 수 있는 불교의 위대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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