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김계수 칼럼위원

입동이 지난 11월, 서리 맞은 풀잎들은 시들었다. 며칠전까지 푸른 잎들에 내려앉은 햇빛을 털어대던 바람들도 날을 세워 숲속으로 달아난다. 숲속에서 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헤집고 다닐 것이다. 가을에 머물고 싶어 하는 바람과 겨울을 가져오는 바람 사이의 풍경들이 쓸쓸하다.

다리 난간에 휘달리는 깃발의 귓불이 따갑도록 바람은 부드러움을 잃었고, 행사가 이미 끝난 현수막의 호흡이 빨라지는 11월의 아침, 붉어진 담쟁이 몇 남은 잎을 보며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기억한다.

모든 시작이 느려지는 월요일 아침이다. 얇게 퍼진 아침햇빛을 휘어진 등으로 받아진 노인들이 내과 병원으로 몰려든다. 토·일요일 동안 아픈 몸을 방바닥에 맡긴 채 남겨진 밥처럼 두루 외로웠으니 나들이 삼아 병원을 찾는다는 할머니, 만성 천식 병원비와 약값해서 7000∼8000이면 나들이 비용치고는 만족할 만하다. 못 만났던 친구들을 병원에서 만나 어제 일을 한참 지난 일처럼 수다를 펼치고 나면, 함께 살아 있었다는 그리운 안부들이 병원 대기실을 꽉 채운다. 간호사들이 불러주는 숙자·봉자·임자 같은 이름에 수줍게 대답하면서도 즐거워 할 것이며, 몇 주 보이지 않는 다리를 심하게 절던 한 할머니의 부음소식을 귀동냥으로나 들었어도 잠깐 눈시울을 젖어주는 따뜻함도 보인다.

"봉자 할머님, 건강이 많이 좋아졌어요, 앞으로도 약 잘 먹고 운동 꾸준히 하세요."

건강이 좋아졌다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내 약 잘 먹고 있노라고 간호사를 따라다니며 자랑 치듯 말씀하신다. 기분이 좋아진 봉자씨의 허리가 자랑스럽게 펴지는 월요일 개인병원 내과 대기실에서 조용히 고혈압 약을 받아든 50대 남자의 뒷모습은 또 쓸쓸하지 않은가.

국가대표 축구경기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오른발과 근육이 움찔해지는 건강한 대한의 남자가 고혈압 처방전을 받아든 뒤로는 발걸음이 부서진 햇빛처럼 조용해졌다. 병원 앞 난전에 펼쳐진 부추나 가지런히 가려진 잔파를 보며 밥상을 차리고 기다릴 아내 생각에 울컥해지기도 하는 50대들의 치열한 생활들이여, 11월이 되면 아침보다 저녁이 더 훈기 있고 밝아지는 이유가 사람 때문이라면 참 위안이 되겠다.

파란 하늘 우듬지의 흔들림을 보면서 11월을 느낀다. 아주 얇아진 달력의 끝을 보며 너무 쉽게 보내버린 10월을 불러도 볼 참인가. 잠시 숨을 고르는 11월이 돼 따뜻한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이었으면 한다. 그래, 그래보자.

가을인 듯 겨울은 아닌 듯 버티는 국화향기 앞에서 잊었던 사람을 기억하기라도 한다면 김광석의 그리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치원 차량에 사랑하는 자녀를 배웅하는 젊은 어머니들의 맨 얼굴과 긴 외투 속으로 비치는 무릎 튀어나온 실내복 같은 것들에도 웃어줄 수 있을 것이다.

잎이 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들여다보며 울창했던 숲의 허술함도 알아가고, 나에게 맞닿은 일과 인연이 아니다 생각되면 김 빼지 말고 문득 그만두어버리는 용기도 가져보자. 약 봉지를 받아 든 50대의 쓸쓸한 가장들이여! 내 의지와 생각에 이제는 보상을 해줄만큼 충분히 바쁜 삶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생각하고 그 생각 끝에 이뤄질 수 있는 변화 같은 것은 없다. 11월은 10월을 잘 보내기 위한 머뭇거림이며 12월을 듬직하게 맞이할 준비와 연습의 시간이다.

11월, 그 쓸쓸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어깨와 발걸음이 온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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