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광 칼럼위원
김미광 칼럼위원

봄이다. 마당을 내려다보니 꽃들이 하나씩 싹을 틔우기 시작했고 겨울 내내 움츠리고 있던 나무들도 봄기운을 받아 새순을 올려내고 있다. 봄이면 하루 일과에서 적어도 서너 시간 정도는 마당에서 꽃과 나무를 보며 지내는 나는 사람의 일생이 꽃과 나무의 일생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린시절 계룡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봄이면 학교 통학로 양쪽에 온갖 종류의 꽃들이 심겨졌다. 요즘에는 촌스럽다고 잘 심지도 않는 봉선화·사루비아·맨드라미·매리골드 등. 그 당시에는 봉숭아 빼고는 이름도 잘 몰랐던 꽃들이지만 나의 초등학교 6년 통학로를 해마다 풍성하게 지켜주는 꽃들이었다.

그러다 어느 해 나는 문득 다양한 색깔로 피는 꽃들이 왜 저마다 색깔이 다른지 의문이 들었다. 다 같이 무색투명한 물을 먹고 사는데 왜 누구는 노란꽃이 피고 누구는 빨강, 누구는 분홍색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런 궁금증을 선생님께 아무렇지 않게 쓱 물어도 되는 시절이 아니었기에 혼자 궁금증을 가슴 속에 담고 스스로 답을 생각해내야 했지만 나는 그 때 어렴풋이 창조주의 존재를 인식했던 것 같다. 어떤 꽃이든 물만 먹고 자라는데 이렇게 다른 모양과 다른 색깔의 꽃이 피는 것은 누군가 원래부터 그렇게 그 꽃의 유전자를 조작해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좀 조숙한 어린이였던 것 같다.

봄이면 새싹이 힘차게 대지를 밀고 올라온다. 햇살과 바람과 비에 의해 싹은 자라는데 심어진 위치가 어디냐, 혹은 누가 어떻게 돌보느냐에 따라 꽃의 크기와 식물의 튼실함이 결정돼지기도 한다. 사람이나 짐승이 잘 다니며 밟는 곳에 심은 식물은 꽃을 피우기가 대단히 힘들다.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밟혀 기반을 잃기 때문이다. 또 식물이 잘 자라라고 거름을 너무 많이 주면 영양분 과잉으로 뿌리가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 가을에 뿌리를 뽑으면 흙도 따라 나와서 거름을 적당히 주는 기술도 필요하다. 부모의 과도한 욕심이 자녀를 망치듯 사람의 욕심이 꽃을 망치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 각기 가진 성질이 다르듯이 같은 종류의 꽃이라도 자라는 위치가 어디냐에 따라 꽃이 피고 안 피고가 결정된다. 작년 겨울 초입에 튤립을 심었는데 양지에 심은 것들은 벌써 꽃이 피었건만 그늘에 심은 녀석들은 꽃봉우리조차 달고 있지 않다.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빛이다. 빛이 많고 적음에 따라 꽃과 열매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꽃과 나무들이 양지를 좋아하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양지를 좋아하는 녀석도 있고 음지를 좋아하는 녀석도 있다. 튤립이 꽃봉우리조차 내지 못하던 바로 그 나무그늘 음지에서 고고하게 꽃을 피우는 크리스마스로즈가 음지식물이다.

나는 아직도 꽃에 대해, 사람에 대해 배울 것이 너무도 많고 지금도 배워가고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마당에 서서 사람을 생각해본다. 사람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가. 일단 나부터 예상치 못한 환경이나 상황에 불쑥 튀어나오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내 속에 아직도 내가 모르는 생소한 내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적도 있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나서 자라고 열매 맺고 시들며 죽어가는 것은 사람이나 꽃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데 단지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며 생각하고 다른 존재와 소통하고 마치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사는 것 뿐이다.

언젠가는 지는 꽃처럼 그렇게 스러져갈 것인데 너무 자만하고 교만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한발 만 뒤로 물러나도 이렇게 사람이 다르게 보이고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것을. 무슨 영광을 누리겠다고 그렇게 떠들썩하고 분주하게 살아들 가는지.

오늘도 나는 봄이 오는 마당에 서서 팔자 좋은 개똥철학을 읊조리고 있는 중이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