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김씨 집성촌 제산마을
경주김씨 집성촌 제산마을
  • 이승철 시민기자
  • 승인 2019.03.1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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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의 저산마을(현재의 제산마을)이다. 고현의 동쪽 독봉산 아래 있는 마을로 경주김씨 집성촌이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수월천과 비옥한 들판의 지세로 봐서 오래전부터 인류가 정착하고 살았던 양반 촌이다.

주변의 전답에는 파릇파릇한 곡식들이 자라고, 아직 개간 되지 않은 땅과 함석지붕도  보인다. 멀리 국사봉 아래 수월과 수양마을이 아늑한 이웃마을로 정답게 자리 잡고 있다.

저산마을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마을 뒷산 독봉산에 닥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서 닥나무 산이라 해 닥나무 제(楮)자를 써서 제산(楮山)이라 했다. 그 후 이곳을 지나던 도를 통한 스님이 뒷산이 돼지 한 마리가 고현만을 향해 내려다보고 있으니 돼지산이라 했다. 그 뜻을 따라 고종 32년(1895)에 칙령 제98호로 돼지 저(猪)자를 써 저산(猪山)이라 했는데 저산의 발음이 제산으로 변음됐다.

제산마을에 속한 중통골이 있었다. 이 지역은 현재 매립돼 중곡동이라 한다. 중통골은 고려아파트 주변 큰길가였다. 이곳에 마산·부산·통영으로 다니는 부두가 있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고, 고현과 수월 양정 저산 마을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됐다. 그 당시 제산 마을은 포로경비대가 있었던 곳으로, 피난민들이 집집마다 주민보다 많이 살았다. 그 때 이곳에 미군 제93공병대와 국군 33경비대가 있었다. 피난민들은 철조망가에서 포로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고 난민들이 골목마다 술집과 음식점을 만들어 장사했다. 새로 생긴 작은 도시처럼 됐다. 작은 극장도 생겼다. 그 당시 이 마을은 양주와 양담배 식료품 의류 등 외제품이 판을 쳤고, 양공주도 많이 있었다. 마치 국제도시처럼 됐다.

이 마을 앞 76수용소에서, 1952년 5월7일 포로수용소 사령관 프란시스 도트준장 납치 사건이 있었다. 1952년 5월9일 폭동을 제압하기 위해 포로수용소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 사건으로 소개난민신세가 돼 마을에서 쫓겨났다. 포로들이 돌아간 후 1956년 옛 집으로 돌아오니 폐허가 된 포로수용소 막사와 경비막사의 잔해가 곳곳에 무너져 있었고. 한길이 넘는 잡초가 우거져 있어서 누구의 집인지 땅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주민들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폐허가된 땅을 복구해 옛 모습을 찾았다. 그때만 해도 마을 앞 계천에 감태(海苔)를 비롯해 바지락·샛굴·은어·붕어·피라미 등 해산물이 풍부했으나 지금은 주변의 공해로 없어졌다.

1979년 1월5일 육군 제39사단 예하 제756예비군 부대가 주둔했고, 1994년 9월27일 제산1·2·3마을로 됐다가, 1997년 10월31일 제산4·5·6마을로, 1998년 4월17일 제산7마을로 분리, 2005년 11월 제산8마을이 형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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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불 2019-03-18 08:19:20
좋은 정보네요^^ 동네에 대해 잘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