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래선 논설위원

▲ 강래선 논설위원

얼마 전 대전의 모 중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단체로 여선생님을 보며 음란행위를 벌인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고전은 차치하고서라도 선생님에게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한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스승의 권위가 얼마만큼 추락했나를 여과 없이 보여준 사례다.

또 최근 경남의 모 초등학교 여교사가 초등학생을 꾀어 부적절한 성관계를 맺어 세상을 경악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여 교사는 너무 좋아서 앞뒤 분간을 못하고 저지른 실수라고 변명했지만 스승이 제자를 그것도 초등학생을 유혹해서 자신의 성적욕구를 채웠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다.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이런 일탈 행위가 사춘기를 겪는 아이들만의 문제도 성숙되지 못한 일부 선생님의 개인 문제로 치부하고 덮어서는 안 된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나라 교육 정책에서 인간이 동물과 달리 갖춰야 할 인성을 무시한 결과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한번 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 마다 교육정책에 대한 근간이 흔들렸다. 특히 대학 입시와 관련해서는 너무 자주 바뀌어 이젠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끝이 나고 엄마의 정보력과 아버지의 경제력이 용을 만드는 시대라는 유머로 회자되고 있다.

지금도 서울 소재 유명 대학 입학에 목숨을 건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인성 교육보다는 수시전형에 맞춘 생활기록부 한 줄 더 잘 쓰는 지도를 바란다. 또 봉사를 통해 배려를 가르치기 보다는 전공과에 맞는 스토리를 엮어내는 봉사를 만들어 내고 독서도 마찬가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인식이 팽배해 아이들은 비뚤어지고 선생님의 권위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때이다.

지난주 지인들 모임에서 이런저런 학생들의 일탈 행위와 스승의 권위 추락에 대해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왔다. 이날 모 인사는 최근 일어나는 학생들의 일탈행위는 선생님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 자식만 소중하다는 부모의 잘못된 교육관이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요즘 젊은 부모들은 자식의 잘못된 인성을 훈육하는 선생님에 대해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행여나 차별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먼저 한다. 또 문제가 생기면 아이들 말만 전적으로 신뢰하고 선생님을 무시하는 언사를 내뱉는 일이 다반사이다.

선생님은 자신이 소중한 만큼 상대방의 인격도 소중하다는 것을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데 그럴 시간도 없고 설령 가르친다고 해도 부모들이 나서 내 아이 인성교육은 내가 할 테니 학교는 공부만 시켜달라고 오히려 역정을 내는 부모가 많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에게 도를 넘는 아이 사랑과 인성 교육은 오히려 오해를 받고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니 자제하라는 식의 이야기도 심심찮게 하고 있다고 한다. 참 무섭다. 선생님이 아이들 교육에 방관자적 자세로 임해야지 한발 더 나아가면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면 과연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울까.

최용우 작가가 쓴 '청소부 친구가 더 좋은 이유'라는 책에 두 아버지의 이야기가 있다. 한 아버지는 한 철에만 농어 낚시가 허용 된 호숫가에서 낚시를 하다가 허용된 시간 이전에 아들이 잡은 대어를 놓아주기를 권유한다.

아들은 아무도 본 사람도 없고 잡은 시간은 거짓말 하면 되지 굳이 잡은 고기를 왜 놓아주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정할 때 아버지는 규정은 보는 사람이 없어도 지켜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 아이는 자라서 모범적인 기업인이 됐다.

또 다른 아버지는 아들과 자동차 여행 중 신호위반을 단속한 경찰관에게 봐 달라며 뇌물을 슬쩍 찔러주고 무마한다. 그리고 의아하게 쳐다보는 아들에게 '애야 다들 그렇게 한 단다' 라고 말했다. 그 아들은 커서 회사의 돈을 횡령해서 감옥에 갔다. 그리고 면회 온 아버지에게 다들 그렇게 하는데 나만 재수가 없어 그렇다고 변명했다.

나는 어떤 부모 인가. 혹시 사랑하는 자녀를 미래의 범죄자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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