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영삼 대통령 서거 1주년

지난해 늦은 가을, 대한민국 정치사의 거목이 영면에 들었다. 오는 11월22일은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1주기다.

YS를 빼놓고 한국 정치사를 논할 수 없다. YS를 잊은 채 민주주의를 기억할 수도 없다.

YS는 정치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민주화 투쟁으로 보냈다. 1954년 자유당 시절 YS는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박사님, 3선 개헌은 안 됩니다"라고 직언한 뒤 탈당해 기나긴 야당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거칠고 직설적인 화법, 패기만만한 행보로 '야당의 맹장'이란 평을 얻기도 했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이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라이벌로 부상하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는 야권의 지도자가 됐다. 모든 민주화운동의 선봉에는 그가 있었다. 1979년 10월4일 의원직 제명은 부마항쟁의 기폭제가 됐고, 유신정권의 종말을 불렀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군정종식에 목숨을 걸었다. 1983년에는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이며 민주화 세력을 재결집하도록 했다. 계속된 군부의 탄압 속에서도 결국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 쟁취의 중심에 섰다.

1992년 민자당 후보로 14대 대선에 출마해 당선된 YS는 이듬해 대통령 취임 이후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군 사조직인 하나회를 숙청했고,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다. 북한에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하기도 했다. 문민정부의 시작이었다.

취임 3년차인 1995년에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켰다. 특별지시로 지방자치제도를 확대해 특별시·광역시장, 도지사 및 시장·군수 등을 주민이 직접 선출하게끔 제도를 개정했다. 1996년에는 아시아 국장 중 두 번째로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 기구(OECD)에 가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권 말기는 암울했다. 1997년 1월 한보 철강으로 시작된 도미노식 부도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12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수모를 겪었다. 1998년 2월24일 열린 퇴임식에서 YS는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고 말했다.

대통령 퇴임 이후 YS는 일생의 라이벌이자 민주화 동지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자신이 정계로 입문시킨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도 마찬가지였다.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YS는 '노무현 대통령 장의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됐다. 그해 8월에는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을 방문해 DJ를 병문안 하기도 했다.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민주화의 투사로, 강인한 승부사로, 소통과 포용의 정치인으로 파란만장 했던 삶을 살았던 정치9단 YS의 정치인생을 사진으로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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