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澗松)
간송(澗松)
  • 거제신문
  • 승인 201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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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아내는 여자중학교에서 국어와 한문을 가르치고 있다. 몇 해 전 평생을 관리해야 하는 병을 얻어 웬만하면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리한 일은 안 하려고 한다. 그런 아내가 올 봄 아이들과 학교 텃밭에서 농사를 지어 보고 싶다고 했다. 집에서 화분에 물주는 것과 간단한 야채를 경작하는 정도 밖에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무슨 농사냐며 나는 호응을 해주지 않았다.

아내는 의외로 집념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농업기술센터에 자문을 구하고 각종 농사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교장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기존 동아리들을 엮어 이른바 '농사짓기 연합동아리'를 결성했다.

저러다 말겠지 싶어, 간혹 퇴근 후에 아이들과 있었던 이야기들을 할 때도 별로 귀 담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반찬이 오이소박이, 가지볶음, 고추장아찌 같은 야채 일색으로 세팅이 되는 게 아닌가.

혹시 싶어 물었더니 첫 수확을 해서 시장을 열었단다. 선생님들이 퇴근길에 야채를 사 주셔서 아이들이 너무 신나 한다면서. 농사 병이 깊어지더니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평소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촌스런 햇볕가리개도 사고 각종 농사도구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시작된 아내와 아이들의 농사여정은 교장 선생님과 동료교사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풍작을 이룬 모양이다. 추석 명절이 코앞이라 다른 때 같으면 차례음식에 쓰일 장 보는 일로 분주할 텐데 오늘은 아이들과 함께 플리마켓에서 수확물을 판매한단다.

농사지은 각종 야채에 수세미와 효소, 장아찌, 비누처럼 손 가는 것들도 많아 보인다. 땀 흘려 지은 결과물을 아이들이 직접 시장에 나가 유통까지 해 보는 게 더 재미있고 교육적으로도 완성도가 높아 보인다는 아내의 웃는 얼굴에 농심(農心)이 스쳐 지나갔다.

캐릭터까지 디자인해 마치 창업을 한 듯, 신나하며 장으로 나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오랜만에 제대로 된 추석을 맞는 기분이 든다. 그 동안 애쓴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동료교사들은 올 추석, '진짜 결실의 계절'을 맞는 것 같다.

2년 전, 서울에 오래 머물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일을 보러 갔는데 '간송문화전'을 개최하고 있었다. 간송의 미술품이 첫 바깥나들이를 하게 돼서인지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이전엔 간송미술관에서 특정 시기를 정해 소장품들을 보여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관람객들이 장사진을 이뤄 수 백 미터 줄을 서는 건 예사고, 아침 일찍 가지 않으면 두어 시간 줄 서서 대기하는 건 각오를 해야 했다.

간송(澗松) 전형필은 1906년 서울 종로에서 미곡상을 하던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요즘 표현으로 금수저였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하고 어려운 시국이긴 했지만 부자가 자기 혼자 호의호식하며 살자고 마음먹었다면 얼마든지 일신을 편하게 유지할 수 있었을 터인데, 간송의 선택은 그런 개인적인 안락함에만 머룰 지 않았다. 그리고 고맙게도 그의 그런 선택과 노력이 지금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로 오롯이 남아 있는 것이다.

간송은 젊은 시절 조부모와 부친 그리고 친형의 갑작스런 죽음을 차례로 맞으면서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게 됐다. 하지만 이런 충격으로 인해 인생을 대하는 자세에 진중함과 깊이가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종 사촌인 월탄 박종화의 영향으로 진학한 휘문고보에서 평생의 스승인 춘곡 고희동을 만났고 그 후에 춘곡의 소개로 독립 운동가인 서예가 오세창을 만나게 된다. 이들과의 만남은 간송에게도 의미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문화재를 이 만큼이라도 지키게 되는 중요한 조우가 되는 셈이다.

춘곡은 간송에게 "글을 읽는 선비가 아니라 조선의 문화를 지키는 선비가 되라"고 주문했고 오세창은 문화재에 대한 안목을 키우는데 도움을 줬다고 한다.

여기에 따뜻함과 배포까지 타고난 간송의 처세가 어우러져 꼭 지키고 보존해야 할 문화재에 대해선 판매상이 당황할 만큼 사례를 하며 본인 스스로 문화재의 가치를 먼저 인정했다 하니 그런 소문들로 수많은 소장자들이 문화재를 들고 간송의 집 앞으로 모여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수집된 것이 국보만 12점, 보물은 10점이 된다. 훈민정음 해례본도 그를 통해서 보존됐다. 올해는 간송의 탄생 110주년이 되는 해다. 그의 농사가 요즘 제대로 결실을 맺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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