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진국 칼럼위원

▲ 석진국 거제공증사무소 변호사
나는 70년대 말 유신 말기에 대학에 들어가서 80년대 초·중반 5.18 신군부 독재를 거치는 기간에 천문학과를 다니다 중퇴하고 사법시험에 도전해 1985년 합격했다. 그 당시 내 목표는 오직 몰락한 내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돈을 벌겠다는 것뿐이었다.

시험 준비기간 3년은 새로운 분야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합격이라는 성취욕에 부풀어 그리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즐거웠는데, 1986년 사법연수원에 들어가보니 대부분의 연수생과 교수들은 출세와 돈벌이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변호사 과목 교수로 들어왔던 오직 한 사람, 황인철 변호사의 "여러분들은 하늘이 내린 인재들이니 자신만을 위해 살지 말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살아보라"는 말은 마른 가뭄에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이분은 나중에 알고 보니 인권변호사로 활약했었다.

내가 1988년 봄 마산에서 변호사로 첫 출발했을 때 10여명 변호사 중에서 '인권과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법원과 검찰도 다르지 않았다. 변호사회에 나가보면 '어떻게 하면 세금을 덜 낼 수 있나'가 공통의 관심사였고, 사건수임은 소개자에게 30%씩 소개료를 주지 않으면 안됐다.

아무리 내가 돈을 벌기 위해 변호사가 됐다고 하지만, 인권과 정의를 위해 일해야 하는 변호사인데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그렇게 고민하던 그 해 여름, 노무현 변호사 아니 국회의원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1987년 부산법원과 검찰에서 실무연수를 받았고 그는 그 무렵 김광일 변호사와 같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1988년 초 당선됐다. 그는 그 해 가을 청문회 스타가 됐다.

그가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해 만난 자리에는 몇 명의 노동조합 간부들이 동참했다.

"마산·창원지역에 노동자·학생 사건이 많은데 마산에 있는 변호사들이 이런 사건수임을 기피하고 부산의 문재인 변호사 사무소의 변호사 2~3명으로는 부산사건도 다 처리하기 힘들어 마산·창원 사건을 맡을 수 없다. 석 변호사가 젊으니 이런 사건을 좀 맡아 줄 수 없겠소?" 

"제가 도둑도 살인범도 변호하는데 왜 노동자·학생을 변호하지 못하겠습니까? 보내주십시오."

이렇게 시작한 나의 인권변호사로서의 고난은 5년간 지속됐다. 

1999년 김해 공항에서 노무현 당시 민주당 부총재를 만났다. "석 변호사, 나 때문에 고생 많았소." 그것이 그와의 딱 두 번 만남이었고 그 후에 그는 몇 번의 낙선을 거듭하다가 대통령이 됐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변호사, 판·검사 중에서 나의 인권변호사 활동에 동조하는 사람은 1/100도 되지 않았고 보통 사람들도 내 편은 아주 적었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이 되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고 천지가 개벽한 듯했다.

다시 몇 년의 세월이 흘러 그의 퇴임과 자살. 그의 고통을 짐작하지 못하는 바 아니지만 그것은 분명 큰 사람으로서의 길은 아니다. 나는 동정은 하지만 동조하지는 못한다.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면 노무현이 꿈꾸던 세상은 지금 이뤄졌는가? 아직 아니더라도 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야당 대통령이 나오면서 즉 김대중·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서 우리 민주 사회로의 여정은 탄탄대로를 걷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일제시대부터의 부자들 세상은 변함없이 튼튼하고 서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지고 있으며 부자들이 지배하는 언론은 서민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다. 형식적인 민주화는 이뤘지만 실질적인 민주화는 아직 멀다.

이제 노무현 7주기를 맞이해 그의 죽음을 찬양하고 동조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잘못된 일로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꿈꾸던 세상, '사람이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각자 작은 노력이라도 보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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