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창 명인 벽산 여이균 선생

'옛 사람은 이미 황학을 타고 가 버리고 이곳엔 텅 빈 황학루만 남았구나…(중략)…맑게 갠 냇가로는 한양 땅의 가로수가 역력히 보이는데 한수 어구의 잡초 무성한 곳은 앵무주라는 섬이로구나.'

중국 관료인 최호의 '황학루' 한시를 우조지름시조로 변형한 '석인이 누런 학을 이미 타고 가니(석인이 이승)'의 꺾고 굴리고 읊는 소리가 들린다. 요즘 세대에는 낯설지도 모르겠으나 들을수록 매력 있는 우리의 가락이 이어진다.

거제지역에 현존하는 시조창 명인 3명 중 1명인 벽산 여이균 선생(88)은 하청면 실전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6.25 한국전쟁 때 징병되면서 거제를 떠났다. 긴 시간 고향을 떠나 있었던 여 선생은 1988년 60살의 나이에 다시 고향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가 말해주듯 그의 삶은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라고 불릴 수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외환위기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낱 민초에 불과한 여 선생 역시 역사의 시류를 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육군 대위, 농협 직원, 외국인기업체 지역장, 물류업 영업소장 등 다양하고도 많은 직업을 거치면서도 누구보다도 바쁜 삶을 열심히 살 수 있었던 자신을 자랑스럽워 하며 이것이 놓지 않았던 희망의 증거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여 선생의 삶속에 시조가 찾아든 것은 너무나도 우연한 기회였다. 농협에서 23년을 근무하며 직장 생활 속에서 새로운 고객을 찾아나서야 하는 입장이었던 여 선생에게 시조는 자신에게 예술이 아닌 이익을 창출해 줄 도구였다.

여 선생은 "삼랑진농협에 있을 때 신규 고객을 끌어와야 하는데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고심하고 있을 때 시조모임의 구성원을 고객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생각에 모임에 나가게 됐다. 그것이 시조와의 첫 만남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런 그가 우연히 듣게 된 김월하 선생의 시조창은 그때 시조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또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인 석암 정경태 선생과의 만남은 시조창에 대한 그의 철학을 굳건히 만들었다.

여 선생은 "김월하 선생의 소리를 듣자마자 반해버렸다. 그 이후부터는 시조모임과 고객유치가 주객전도 됐다"며 "시조에 관심을 갖고 매진하다보니 석암 정경태 선생의 시조철학에까지 이르게 됐다"고 말했다.

남들보다 늦었던 시작이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배웠다는 여 선생. 그 마음과 노력 덕분에 각종 전국 경창대회에서 수상해 명인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는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어릴 때부터 흥이 있어 동네에서 노래 부르기로 유명했다. 노력도 많이 했지만 천부적 소질도 일부 영향을 줬을 것"이라며 '목포의 눈물' 한 자락을 멋들어지게 불러 보였다.

시조창을 부를 때면 답답했던 마음이 확 트인다는 여 선생은 오늘날 시조창에 대해 공부하려는 이들이 적은 것에 우려를 표했다.

여 선생은 "흥이 나는 가락이 아니라서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의 것을 우리가 좋아해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쉽게 생각하면 쉬운 법이고, 어렵게 생각하면 어려운 법이다. 먼저 두드려봐야 한다"고 당부의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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