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창수 칼럼위원

▲ 천창수 지세포제일교회 목사
어느 날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기드온을 불렀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겨야 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자, 하나님은 7년 동안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셨다. 미디안의 압제 하에 신음하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 부르짖음을 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신 것이다.

기드온은 포도주 틀에 앉아 있었다.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는 지금 포도주 틀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다. 농사를 지으면 미디안이 다 뺏어갔고, 그래서 미디안 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포도주 틀에 숨어 밀을 한줌씩 훑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다. 초라하고 처량한 모습으로 밀 이삭을 훑고 있는, 스스로도 참 한심하고 못나게 느껴졌을 기드온. 이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나님은 "큰 용사여" 하고 불렀다. 그리고 "너는 가서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기드온을 큰 용사라 부를 수 있는가? 하나님을 만나는 이 순간에 기드온은 도둑고양이처럼 숨어서 밀 타작을 하고 있다.

도둑질한 것도 아닌데, 숨어서 몰래 밀 이삭을 훑고 있는 것이다. 바짝 긴장한 채 조심스레 밀 이삭을 훑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한심하고 비참하게 느껴지겠는가?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게 생각되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큰 용사라고 부르신다.

지금 기드온의 모습이 큰 용사 같은가? 사람들에게 들킬까 노심초사 하며 포도주 틀에 웅크리고 앉아 밀 이삭을 훑고 있는 기드온의 모습이 과연 큰 용사 같은가? 그런데 하나님은 왜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르시는가?

"큰 용사여" 부르는 이 말은 기드온을 놀리는 말이 아니다. 포도주 틀에서 밀 타작을 하고 있는 기드온을 비꼬는 말도 아니요, 기드온을 약 올리기 위해 부르시는 이름은 더더욱 아니다. 기드온이 큰 칼 휘두르며 적과 싸울 때 "큰 용사여" 불러주셨다면 얼마나 폼이 났겠는가? 그런데 포도주 틀에 숨어서 밀 타작을 하는 기드온을 "큰 용사여" 부르니 창피했을 것이다. 자기 꼬락서니가 우스웠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큰 용사로 쓰시겠다는 것이다. "큰 용사여" 이 말씀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기드온을 큰 용사로 쓰시겠다는 것이다. 기드온 같은 자를 들어서 큰일을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면 큰 용사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초라한 사람도 비참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면 큰 용사가 된다.

돈이 많은 사람이 큰 용사가 아니다. 대통령이나 장군이나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큰 용사가 아니다. 진정한 큰 용사는 내 인생의 목적을 바로 알고 그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다. 직업이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공부 일등을 하느냐 꼴찌를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가슴에 금배지 달고 목에 힘주고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졸부가 많다. 반대로 날마다 손에 흙 묻히고 기름 묻히고 사는 사람들 중에도 큰 용사가 많을 수 있다. 전교 1등해도 졸부일 수 있고, 전교 꼴찌해도 큰 용사일 수 있다. 큰 타작마당에서 도리깨질 하고 있어도 형편없는 졸부일 수 있고, 항아리 속에 숨어서 부지깽이로 밀 이삭을 털고 있어도 큰 용사일 수 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사는 것이 인생의 최고 목적인 줄 알고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이 큰 용사이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키는 일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고 달려가는 사람이 큰 용사이다. 하나님은 약할 때 강함 되시는 분이시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모든 핑계는 내려놓고 큰 용사로 쓰임 받으며 달려가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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