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석 칼럼위원

▲ 김한석 전 거제문인협회장
끝까지 굽히지 않는 정신을 지조(志操)라고 한다. 지조는 어디까지나 역 환경 속에서도 대의(大義)에 둔 이야기일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우리들은 여기서 부적응과 나아가서 적개심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들은 상대를 의심하게 되고 적으로 삼는다. 적으로 마음에 담으면 불행의 지조로 돌아가버린다.

지조가 지선한 그리고 유일한 덕목일진대 그 개성도 편협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의 세계는 선린과 우방으로 발전하여 하나로 태어나는 영예로운 사명이 남아 있다. 우리들은 끝까지 남아 우방이 되어야지 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불행의 지조 역시 행복의 지조로 성장 발전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지조의 굽힘이 아니다. 우리가 악몽에 시달리는 때도 저마다의 지조가 원초에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의 일부는 제주도 4.3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같은 직접적인 피해자의 후예로 그 원한이 제대로 풀어지지 않아 적개심을 품을 만큼 역사적인 고뇌를 되새기고 사는 것도 사실이다. 크게는 6.25동란의 민족적 비극이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원초적 어둠의 악순환을 겪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는 어둠이 아닌 광명을 지향하는 향일성의 생리를 부인 못할 것이다. 결코 우리들은 행복의 아들이 될지언정 불행의 고리를 물고 있을 수는 없다. 적개심을 바르게 하는데 더 큰 뜻이 있다. 악마나 두려움의 편에서는 어둠이 조상이라면 적어도 인간의 역사는 밝음의 아들이 아니겠는가.

불을 발견한 인류는 원시시대부터 밝은 문화에 길들여져 있다. 이런 일은 몇 년의 일이 아니고 적어도 수십 만년에 쌓인 인류의 경험적 진화의 축적이라고 할 수 있다. 포용에서 마침내 화합이라는 국가발전의 밑거름을 얻어낸 것처럼 우리들도 이제 배타적 정쟁은 멈추어야 한다.

선대 히틀러로 인한 아우슈비츠 감옥 등에 수용된 유태인 대학살의 죄과를 통회하고 한편 미래의 광명(빛)적 신화를 모색하여 독일은 마침내 통일독일의 대 통합을 이루어 냈다. 이러한 광명과 화합 지향적 용기는 인류 생존의 영원한 미덕이다.

중요 국가들의 힘겨루기 틈새에서도 우리들의 뭉친 힘이 능동적으로 선도적 역할을 다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하버드대 종신교수 삭스의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예찬은 이미 그가 지난 10년째 아프리카 빈국의 자립경제를 선도하는 유엔 밀리니엄 빌리지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어 우리에게 다시 한번 국가 발전의 불길을 찾게 하는데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새마을운동의 성공사례는 금세기 중국의 농촌 부활의 일조로 활용하기위해 시진핑 중국 주석도 근래에 언급한 바가 있다. 그는 2014년 7월 내한하였을 때 새마을 정신을 높이 평가 했다.

근면 자조 협동으로 뭉친 민족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위대한 정신이 곧 새마을 운동이 아니던가? 나만 잘 살자는 것이 아니오, 십시일반이 있듯이 협동이면 안될 일이 없고, 그리고 더구나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자조의 진리야말로 오늘날 우리 한국이 처한 진솔 된 발전 성장의 모델이 아닐 수  없다.

자고나면 현실의 뉴스는 불안과 좌절의 역기능으로 도배되기 일쑤다. 풀리지 않는 공무원 연금법이 법안상정 210일째 여야 합의로 겨우 국회통과를 보았지만 완결성 문제로 국민 여론이 비등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밖에 국가안보의 누수현상, 1차 산업과 고차원의 금융 서비스 및 IT·DT 산업에 걸쳐 희망의 새출발을 기약하는 것은 드물다기 보다도 국가 동력을 모아야 된다는 점에서 거의 신뢰감을 잃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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