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작년에 이어 5.18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아니 분분함을 넘어 국론 분열의 양상까지 띄며 예의 이념의 장으로 나아가길 주저하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 '님'이냐 '임'이냐를 놓고 유치한 논쟁까지 펼치는 걸 보면 이 문제의 뿌리나 본질은 철저하게 외면하겠다는 의지까지 읽힌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매년 5·18 추모행사에서 유족과 광주시민들 사이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로 제창됐다. 1997년, 국가기념일로 승격돼 정부 주관으로 첫 기념식을 열었을 때부터 2008년까지, 기념식 마지막 순서에 기념곡으로서 제창됐다.

그런데 2009년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공식 식순에서 제외되고 식전행사로 불리어지다 2011년부터는 제창이 폐지되고 합창단의 기념공연시 삽입되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이 시기부터 이 노래는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2013년 국가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대체할 별도의 5·18 민주화운동 공식 기념곡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혀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정책을 내놓고 말았다.

대강의 사실관계를 떠나 이 노래가 제창으로는 안 되고 합창으로는 가능한 논리를 문화예술계 종사자로서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사전적 의미로 이 두 단어를 풀어 보면 둘 다 '다 같이 부르는 것'은 맞지만 '제창'은 같은 선율을 부르는 것이고 '합창'은 둘 이상의 선율을 나눠 부르는 것을 말한다.

학교 졸업식이나 각종 기념행사에서 불리는 '애국가'는 대부분의 경우 제창으로 불리어 진다.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 개최하는 광복절이나 현충일 같은 국가기념식에는 국가나 지역을 대표하는 합창단이 기념곡을 연주하는 게 일반적인 형태이다.

이런 합창단조차 없는 소규모 지자체의 경우 녹음된 음원을 통해 이 의식을 대신하기도 한다. 아마 이런 관행들이 정착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애국가는 모르는 사람이 없고 파트를 나누어 일체감을 없앨 이유도 없기 떄문에 제창으로 부르고 나머지 기념곡들은 가사나 선율을 참석자 모두가 기억하기 힘들어 자칫 난처한 분위기가 조성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전문합창단이 음악적 완성도를 높여 부르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을 가능성이 높다.

국가보훈처가 굳이 이 노래를 배척하는 공식적인 이유는 1991년, 남쪽의 소설가 황석영과 북쪽의 작가 리춘구가 공동 집필해 제작한 북한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됐다는데 있다. 더 들어가면 노래 제목과 가사에 나오는 '임'과 '새날'의 의미가 이적성이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하지만 정말 그런 이유라면 차라리 부르지 말자고 해야 한다. 합창은 되고 제창은 안 된다는 지침은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방책이다.

위키백과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민중가요로서, 5·18 민주화운동 중 희생된 윤상원과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하여 1981년 작곡되었다. 가사의 원작자는 백기완, 작곡자는 김종률이다. 처음에는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표준어 규정에 따라 통상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고 부른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정리해 보면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1년 남쪽에서 탄생했고 1991년에 북쪽에서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활용되었으며 2002년 월드컵에서는 붉은악마에서 발매한 공식 응원가에도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해외로 수출되어 여러나라의 노동현장에서 번안되어 불리어지고 있다고 하니 어느 특정시점을 중심으로 혹은 어떤 주체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고 촌스러운 발상이 아닌가 싶다.

그냥 문화현상으로 봐 주고 각자가 자기화해서 그들의 공간에서 잘 활용되면 그만인 것이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그것도 뒷날 다른 공간에서 일어난 일로 인해 힘든 시절을 버티게 해준 그 노래를 "이렇게 불러라 저렇게 불러라" 심지어 "다른 곡을 만들어 줄테니 그 곡을 불러라"라고 얘기하는 것은 너무나 반문화적 발상이다.

우리음악은 원래 제창방식이다. 서양의 음악처럼 파트를 나눠 부르지 않는다. '메기고 받는' 주거니 받거니 형태가 우리 민초들의 노래방식이었다. 그래서 제창방식의 저변에는 간혹 두껍게 뭉쳐지고 원시적으로 외쳐지는 뜨거움이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그런 제창의 속성이 두려운 게 아니었으면 한다. 노래 하나 맘대로 부를 수 없다면 그게 무슨 문명국가이겠는가. 대범하게 부르고 싶은 이들이 부르고 싶은 대로 허용됐으면 좋겠다.

우리는 '애국가'조차도 불편한 진실을 감추고 부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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