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철봉 칼럼위원

▲ 문철봉 통영YMCA 사무총장
오월이다. 봄비 잦은 계곡에는 물소리와 새소리가 맑다. 새봄의 꽃들이 피고 진 텃밭에는 심어진 씨앗들에서 여린 싹들이 돋아 하늘을 향해 키 재기를 한다. 상추는 벌써 몇가닥 단을 올렸고 겨울을 난 마늘은 속대를 올리며 매운 향을 품는다. 화단의 꽃들도 싱싱한 오월을 머금었다. 작약은 알토란같은 봉우리를 앙다물었고 목단은 벌써 꽃잎을 떨군다.

아, 장미다. 그 어느 것보다도 향기롭고 아름답게 오월을 장식할 장미가 꺾어서 한입 베어 물고 싶을 만큼 물기 가득한 순들을 뻗었다. 순과 꽃들이 예쁜 담장너머로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 넘어 온다.

그렇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싹들이다. 누구라서 저 사랑스러움을 마다할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 사람은 때때로 저 생물들과 다른 모순들을 지녔고 때로는 이 모순 속에서 잃었던 순리와 진리를 찾는다.

서울 서초동 가정법원청사 소년법정. 16세 소녀가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 등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됐다. 소녀는 14건의 절도·폭행을 저질러 이미 한 차례 소년법정에 섰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법대로 한다면 '소년보호시설 감호위탁' 같은 무거운 보호처분을 받을 수 있는 죄인이다.

그러나 판사는 이날 소녀에게 아무 처분도 내리지 않는 '불처분 결정'을 내렸다. 그가 내린 처분은 '법정에서 일어나 외치기'였다. 판사는 다정한 목소리로 '피고는 일어나 봐' 하고 말했고 잔뜩 움츠리고 있던 소녀는 마지못해 쭈뼛쭈뼛 일어났다. 그러자 판사가 말했다. "자, 날 따라서 힘차게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예상치 못한 재판장의 요구에 잠시 머뭇거리던 소녀는 나직하게 "나는 세상에서…" 라며 입을 뗐다. "자, 내 말을 크게 따라 해 봐. 나는 무엇이든지 할수 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큰 소리로 따라 하던 소녀는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라고 외칠 때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판사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소녀가 범행에 빠져든 가슴 아픈 사정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소녀는 본래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간호사를 꿈꾸던 발랄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남학생 여러명에게 끌려가 집단폭행을 당하면서 그녀의 삶은 급속하게 바뀌었다. 소녀는 그 사건의 후유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고,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신체 일부가 마비되기까지 했다. 심리적 고통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소녀는 그 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비행 청소년과 어울리면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판사는 울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가해자로 재판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쉽사리 말하겠습니까? 아이의 잘못이 있다면 자존감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존감을 찾게 하는 처분을 내립니다."

이 말을 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진 판사는 눈물범벅이 된 소녀를 법대(法臺)앞으로 불러 세웠다.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할까? 그건 바로 너야. 그 사실만 잊지 않으면 돼. 그러면 지금처럼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러고는 두 손을 쭉 뻗어 소녀의 손을 꼭 잡았고 "마음 같아선 꼭 안아주고 싶은데, 우리 사이를 법대가 가로막고 있어 이 정도밖에 못 해주겠구나"라고. 서울가정법원 내에서 비공개로 열렸던 명판결 일화이다.

오월은 푸르고 아이들은 자란다. 하지만 아이들은 식물과 달리 영혼과 마음과 지체가 함께 있는 유기적인 존재다. 이 가운데 분명히 자리해야하는 것은 '나'라는 자아(自我)가 있는 바른 자존감이다.

오월, 청소년의 달, 식물적인 자람과 사랑만이 아닌, 청소년들이 생각하고 걷고 달리며 외치는 현장을 어떻게 만들어 주며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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