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광 칼럼위원

우리 국민 모두의 가슴을 찢어놓았던 세월호 사건이 1주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세월호의 책임감 없는 선장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승객을 버리고 살아남았지만 그의 남은 인생은 죽은 인생보다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 외국인 친구를 만났는데 그녀가 하는 말이, "너희 나라 사람들 좀 인성 개발이 덜된 부분이 있다. IT는 첨단을 달리고 생활 수준도 꽤 높은데 어느 한 부분, 특히 사람들의 의식에서 뭔가 덜 성숙한 것 같은 부분이 있다.

특히 임기응변식 정책이나 큰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대처방안 등."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우리 국민이 몸만 선진화 됐지 정신은 아직 미성숙한 국민이라는 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자칭 선진국 인간이 우리나라를 우습게 보는 구나 싶으니 그 친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세월호 사건 동안 그 친구 앞에서 기를 못 펴다가 어느 날 신문에서 세월호 선장같은 사람만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의로운 선택을 한 영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어느 일간지에 읽은 또 다른 우리나라 선장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지난 1985년 11월, 우리나라의 원양어선 '광명87'호 전제용 선장은 인도양에서 참치를 가득 잡아 남중국해를 돌아 부산으로 오고 있었다. 그때 바다 한 가운데서 S.O.S를 외치는 베트남 보트 피플이 탄 목선을 만났는데 그 배에는 임산부와 어린아이를 포함한 96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이 앞서 만난 25척의 배들은 그들의 필사적인 구조 요청을 이미 거절했다.

전제용 선장은 보트 피플 구조요청을 회사에 알렸으나 회사에서 돌아온 답은 그들의 구조에 '관여치 말라'는 것이었다. 그들을 그대로 두면 난파하거나 바다 한 가운데 다 굶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전 선장은 선원들을 설득해 뱃머리를 돌려 그들 모두를 구했다.

96명의 사람들이 선원 25명의 열흘 치 식량과 물을 나눠 먹었고 식량이 떨어지자 남은 참치가 많다며 전제용 선장은 보트 피플들을 위로 했다.

부산항에 도착하자 보트 피플들은 살길을 찾았으나 전 선장은 회사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해고 통지를 받았으며 당국에 불려가 혹독한 조사를 받고 선장 자격을 박탈당해 어떤 회사에도 취업을 할 수 없게 되어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됐다.

그는 보트 피플을 구하기 위해 뱃머리를 돌릴 때 이미 각오한 일이고 후회한 적이 없다 했다. 살길이 막막해진 그는 고향인 통영으로 내려와 멍게 양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구조된 난민들은 부산적십자구호소에 있다가 미국, 호주 등으로 이주를 했는데 그들은 전제용 선장이 그들의 목숨을 구한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선장으로서 그의 경력과 인생을 96명의 목숨과 바꿨고 자신이 난처해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뒤늦게 알게 되었고, 지난 2004년, 베트남 보트 피플의 대표인 피터 누엔씨는 전 선장을 자신이 살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로 초청하여 그와 재회하여 감사를 표시했고 그 때 목숨을 구한 난민들은 UN 난센상 후보로 추천했다.

비록 다른 나라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삶을 희생해서 목숨을 구한 것은 진정 의로운 선택이었다. 선장으로서 좋은 경력으로 윤택하고 안락한 삶을 살수도 있었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생명이었다. 성경에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한 사람의 생명이라는 말도 있다.

세월호 선장같이 인간으로서 상식과 도리를 저버린 인간들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는 전제용 선장같이 자신의 삶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외국인 친구에게 하자 그녀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는 얘기를 꼭 전하고 싶다. 이제 다시 그런 자기 희생의 용기가 그리워지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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