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7년 철산에 사는 서돌남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와 보니 어떤 남자가 아내와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면서 치마에 손을 대는 것을 보고 간통을 의심하고 그 자리에서 남자를 때려 죽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직접적인 간통현장을 목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개연성만으로도 간통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서돌남은 사람을 죽이고도 얼마 후 풀려났다.

성종실록(성종 5년)에는 참봉(參奉) 신자치(愼自治)가 계집종 도리(道里)와 간통한 것을 그의 아내 이씨(李氏)가 알고 도리를 잡아와 머리를 깎고 옷을 벗기고 쇠를 달구어 가슴과 음문(陰門)을 지져 죽여 흥인문(興仁門) 밖 산골짜기에 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신자치의 처가 양반이라는 이유로 장100대로 끝냈을 뿐 신자치에 대한 처벌은 기록이 없다. 노비였던 도리의 죽음만 억울할 뿐이다.

조선의 간통제 처벌은 양반과 남자에게는 비교적 관대했지만 여자와 노비에게는 가혹했다. 오늘날의 간통은 남자의 외도를 막아 아내를 보호하려는 뜻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남자의 외도는 용납해도 여자의 외도는 용납하지 않으려는 의도다. 그 당시 간통한 여자는 장(杖)80대를 쳤는데 유부녀인 경우에는 장10대가 추가되고 수치심을 주기 위해 여자의 아랫도리를 벗기고 때렸다. 특히 관청에서는 '자녀안(姿女案)'이라는 대장에 이름이 올려 평생 간음녀의 멍에를 씌었다.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가혹했던 이런 전통은 근대에까지 존재했다. 일제강점기의 형법에 의하면 간통한 남자는 처벌대상이 되지 않고 유부녀만 처벌했는데 이는 일본 형법의 영향 탓이다. 남자의 간통도 처벌이 가능한 쌍벌주의는 1953년이 되어서야 법으로 만들어진다. 간통에 남녀 차별이 있는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법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간통한 여자는 사형까지 시킬 수 있었으나 남자는 그 죄를 묻지 않았다.

일부일처제와 부부간 정조의무의 상징적 보루로 여겨졌던 간통죄가 62년만인 지난 2월 26일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에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자기 몸은 국가가 아니라 자기가 관리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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