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평소 알고 지내는 시민네트워크 관계자로부터 세월호참사 관련 추모행사를 개최한다는 연락이 왔다. 행사장에 쓰일 슬프고 애잔한 배경음악을 좀 선정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언뜻 이런 용도로 많이 사용되는 음악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를테면, 모차르트의 레퀴엠, 마스카니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 비탈리의 샤콘느,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등이 그런 곡들이다. 생각나는 대로 문자를 보내고 나니 슬픈 음악으로 슬픔을 위로해야 하는 상황이 아이러니 하다.

음악은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하고 죽음을 막기도 하며 해탈의 경지와 같은 절대휴식을 제공하기도 하는 마력이 있다. 그래서 많은 음악학자들은 그 비밀을 캐기 위해 몰두해 왔고 어떤 종교에서는 특정한 음계나 화성의 사용이 정서적으로 건강치 못하다하여 경계하기도 하고 음악치료학이 학문의 영역을 넘어 실용적으로 적용되고 있기도 하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본인의 죽음을 직감한 모차르트의 미완성 유작인데 미완성된 부분은 부인인 콘스탄체의 의뢰로 제자인 쥐스마이어에 의해 마무리된다. 본인의 죽음을 직관하는 극도의 불안과 외로움이 마치 음침한 저녁, 배를 저어 강을 건너듯 그려진다. 망자를 그저 관조하기만 하는 제자의 음악적 기교는 이미 죽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 더욱 애절하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아내의 의중은 오늘날까지 의견이 분분하니 죽음보다 더 깊은 인생사의 질곡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지엄하고도 명징하게 인생을 공명시키는 것인 줄 모를 일이다.

서곡(Overture)이 오페라의 전체 줄거리를 이끌며 분위기를 함축하여 주던 낭만주의 시대에 사실주의 오페라(베리스모 오페라)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 첨병 역할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한다. 내용의 변화 못지않게 형식적으로는 간주곡(Intermezzo)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등장하는데 연애비극을 다룬 이 작품에서 이 간주곡은 결투와 죽음에 이르는 장면을 함축적으로 고조되는 선율로 폐부를 후비듯 표현한다. 그래선지 멜로드라마의 비극적 장면에 많이 쓰이고 있다.

샤콘느(Chaconne)는 바로크와 고전주의 초기까지 꽤 인기가 있던 기악곡 양식이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으로 수입된 무곡의 변주곡 형태인데 템포가 느려 일반적인 춤곡이 보이는 경쾌함과 달라 역설적 슬픔이 잔뜩 배여 있다. 비탈리는 이 곡 하나만 남겼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인데 오늘날 지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란 별칭을 얻으며 바흐의 샤콘느를 뛰어 넘는 인기를 구가하다 보니 원래 작곡가가 비탈리가 아니라 이름이 비슷한 비발디일 것이라는 설이 학자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죽어서도 무명인의 설움을 당하고 있는 셈이니 비탈리 입장에선 이승과 저승이 별반 다르지 않다 여겨질 법하다. 

바버는 비교적 최근의 사람이다. 작곡가 이전에 성악가였기 때문에 20세기 이후 현대 작곡가들이 가지는 난해함을 이 곡에서는 찿기 어렵다. 감정선이 분명하며 유려하게 펼쳐지는 선율의 흐름은 오히려 낭만시대 곡이 아닌가 착각하게 될 정도이다. 월남전을 그려 전쟁영화의 수작으로 꼽히는 올리브 스톤 감독의 플래툰에서 영화 속 반즈중사가 불타는 밀림을 배경으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절규하듯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장면. 바로 그 위로 포연처럼 느리게 감싸던 현악기들의 비장감어린 행진은 보는 이의 호흡조차 멈추게 한다.

음악은 약과 같다. 잘 쓰면 약이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된다. 그래서 좋은 음악 나쁜 음악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전 국민이 무기력과 자책 그리고 분노로 정신적 황폐를 겪고 있다. 좋은 음악이 위로가 될 때이다. 좋은 음악으로 마음을 지켜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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