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YMCA 사무총장 문철봉

설 연휴를 포근히 지나고도 봄날 같은 날이 더 이어져 겨울이 정말 다 갔나 했는데 차가운 대륙성 고기압이 영하 10도 안팎으로 떨어지는 맹위를 떨치며 전국을 덮친다. 갑작스런 추위다. 이렇게 입춘(立春)을 맞으니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뜻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회자되는 입춘(立春)을 맞는다.

이 절기를 신문과 방송이 말하기도 전에 지인들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입춘(立春)의 대구(對句)와 단구(短句)들을 날라다 준다.

입춘대길 견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봄을 맞아 크게 길하고 좋은 일이 많기를 바람)을 글머리로 해서 부모천년수 자손만대(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 부모는 천년 장수하시고 자식은 만대까지 번영하라), 수여산 부여해(壽如山 富如海: 산처럼 오래살고 바다처럼 재물이 쌓여라), 소지황금출 개문백복래(掃地黃金出 開門百福來: 땅을 쓸면 황금이 생기고 문을 열면 만복이 온다), 거천래 래백복(去千災 來百福: 온갖 재앙은 가고 모든 복은 오라), 재종춘설소 복축하운흥(災從春雪消 福逐夏雲興: 재난은 봄눈처럼 사라지고 행복은 여름 구름처럼 일어나라) 등이다.

 이 단구(短句)들에 혹해서 바닷가 산책길을 찾아 나선다. 스쳐 지나는 바람에 코끝이 시리다. 하지만 저토록 춥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조금 부지런히 걸으니 미리 껴입고 나온 방한복이 귀찮아지고 오히려 햇살이 따사롭고 바람이 향기롭다. 정말 봄이 저 바다 가까이에 와 있는 것 같고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지나친 엄살 같기만 하다. 이것은 다른 지방과 달리 봄기운을 먼저 얻을 수 있는 남쪽지방에 사는 축복이지 싶다. 돌아 들어와 입춘(立春)의 의미를 되뇌어 본다.

입춘(立春), 4계절에 6절기로 한해 총 24절기 중 첫 절기로 2월 4일 오후 1시 33분, 태양의 황경이 315도일 때이다. 말 그대로 "봄이 들어서다", "봄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입춘의 가장 큰 의미는 설과 같이 한해의 시작으로 인식하는 것이라 한다.  전례로 우리들의 관념에는 4계절의 끝, 즉 겨울의 마침이 한해의 마침이고 봄을 새로운 시작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입춘 전날을 절분(節分)이라하고 이것을 ‘해넘이’라고도 하여 철의 마지막을 뜻하기에 그렇다.

더러는 입춘, 입하, 입추, 입동 등의 명칭이 중국 황하 중류 (낙양, 서안) 지방의 절기를 기준으로 정해진 것이 그대로 전해져서 우리나라의 절기와는 맞지 않다고도 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24절기를 만든 것은 효율적인 농사를 짓기 위한 방편이었고 음력으로만 살던 관습 속에 농사에 필요한 양(해)력을 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니 자연섭리에 따라 봄을 시작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보아 옛 어른들은 입춘을 15일간 5일씩 3후(候)로 갈라서 동풍이 불어서 언 땅을 녹이고, 동면하던 벌레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닌다고 하였으니 신통히 수긍할 뿐이다.

이런 뜻이 담겨 입춘에는 우리가 쉽게 주고받는 입춘대길(立春大吉)과 천하태평춘 사방무일사(天下太平春 四方無一事)등과 같은 대구(對句)와 단구(短句)의 입춘방(立春榜) 또는 첩(帖)을 붙이고 ‘아홉차리’와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을 행하는 세시 풍속이 있다.

아홉 번씩 같은 일을 되풀이 하는 ‘아홉차리’는 학동은 천자문 아홉 번 읽기, 나무꾼은 나뭇짐 아홉 번 하기, 어른은 아홉 번 새끼 꼬기, 아녀자는 나물 아홉 바구니하기와 빨래 아홉 가지하기에서 심지어 밥도 아홉 그릇을 먹고 매 맞는 것도 아홉 번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겨레가 ‘9’라는 숫자를 가장 좋은 양수(陽數)로 여겼고 이 처럼 거듭해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라는 뜻이 담겼다.

또 입춘날이나 대보름날 전야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착한 일을 꼭 해야 연중 액(厄)을 면한다는 적선공덕(積善功德)은 밤중에 몰래 냇물에 가서 사람들이 건너다닐 징검다리 놓기와 가파른 고갯길을 깎아 다른 사람이 다니기 편하게 해 놓기, 다리 밑 동냥움막 앞에 밥 한 솥 지어 갖다 놓기와 행려병자가 누워있는 원(院) 문전에 약탕 끓여 몰래 디밀고 오는 등의 참 좋은 복지(福祉)와 선행(善行)의 세시민속이다.

그동안 분가하여 살아오면서 대문과 대청이 반듯이 있는 집을 가져 보지 못했다. 또 초등학교 시절 습자(붓글씨쓰기)시간 말고는 붓을 잡아 본적이 없어 입춘방(立春榜)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마음 한편엔 늘 저 욕구가 있다. 집엔 대청이 있어 가만히 붓을 쥐어 입춘방(立春榜)을 쓰고 이것을 기둥에 붙이며 지긋이 올려다보고 싶음이 있다. 지금 사는 집이 오두막이라 머리를 숙여 들고 나는 집이지만 이제라도 저 마음을 내어 그나마 쉬울 것 같은 ‘입춘대길(立春大吉)’을 적어보고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의 흉내라도 내볼 요량이다.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착한 일을 꼭 해야 연중 액(厄)을 면한다”는 것이 아니더라도 남을 위해 몰래하는 이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이면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좋아질 것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것은 남이 모르게 해야 하는 것이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생각하고 실천하기 나름, 한밤중에 동네 쓰레기 집하장에라도 몰래 가서 떨어져 나간 수거함 이름표를 다시 달고 널려진 쓰레기를 말끔히 주워 담아 놓고 오면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인 것을....

이렇듯 입춘(立春)에는 옛 조상들이 하시던 좋은 세시풍습을 따라하게 되는 좋은 깨우침과 배움이 있다. 나만이 크게 길(吉)하자고 남을 도외시 하거나 무시해서는 아니 되고 반듯이 배려해야 하는 것, 이것도 나를 숨긴 채 해야 하는 것이니 ‘입춘대길(立春大吉)’에 개문백복래(開門百福來)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부지런하고 착한 행위로 인해서 얻어지는 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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