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을 벽만 쳐다보고 도를 닦은 스님이 계셨다. 황진이(黃眞伊)는 자신의 여자 됨의 매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비오는 어느 날, 황진이는 절집으로 스님을 찾아가 이 깊은 밤 산 속에서 갈 데가 없으니 하룻밤 재워달라고 애원한다. 비에 젖은 여인의 모습은 선정적이다. 거기에 남자에게는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가련함이 더해 이런 유혹을 떨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닐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너무나 담담하게 그러라고 승낙한다. 이미 도의 경지에 있었던 터라 여인과 한방에 있다 해도 파계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사(山寺)의 방에는 희미한 촛불만 타고 있었다. 돌아 앉아 벽을 보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스님의 등 뒤에서 여인은 조용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해군성(解裙聲)'

벗을 해(解), 치마 군(裙), 소리 성(聲) - 희미한 어둠 속에서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만큼 아름다운 소리가 있으랴. 30년 스님의 수도는 이 소리에 한 순간 무너지고 만다. 물론 당시 성리학자들이 불교를 폄하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옛 시인묵객들은 '해군성'을 '들려오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인정하고 있다.

조선 효종 때 홍만종의 명엽지해(蓂葉志諧)에 소리의 품격을 따지는데, 달빛을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의 소리(鄭澈), 단풍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沈喜壽), 새벽 잠결에 들리는 아내의 술 거르는 소리(柳成龍), 그러나 단연 으뜸은 오성대감 이항복(李恒福)의 깊은 골방 안 그윽한 밤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였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김광균의 시 '설야(雪夜)'에서, 첫눈을 '머언 곳에 女人의 옷 벗는 소리'로 비유하고 있다. 깊은 밤에 눈 내리는 소리가 시인에게 마치 어둠 속에서 치마끈을 풀어 치맛자락이 사르르 흘러내릴 때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소리처럼 들린 것이다.

이미 입춘이 지났는데 거제는 이제 눈 오기 글렀다. 올해도 눈 구경 한번 못하고 겨울이 지나간다. 사그락사그락 눈 내리는 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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