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창수 칼럼위원

▲ 천창수 송진교회 목사
신약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서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까지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하니까 혹자는 “아브라함과 다윗이 얼마나 훌륭했으면 구세주가 그 가문에서 오셨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족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숭배하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이 남다른 믿음이 있거나 무슨 선한 일을 많이 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저 우상을 숭배하던 보통 사람 아브라함이었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시니 특별한 사람이 되고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다윗은 어땠는가? 그는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고 그 충복을 위험한 전쟁터 선봉에 세워 죽게 만들었다. 의도적 살인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고, 그 가계에서 구원의 왕이 나와 다윗을 구원하고 우리를 구원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있었던 수많은 허물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약속대로 그 가문에서 메시야가 나게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우리에게 특별한 믿음과 선행이 있어서가 아니다. 애초부터 우리는 믿음 밖에 있었다. 약속의 자손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밖에 있던 존재요,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불러 주셔서 자녀 삼아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몇 명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여기 등장하는 여인들은 메시야 족보에 이름을 올릴만한 자격이나 경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성경에 그들의 과거를 기록하기조차 낯 뜨거운 이상한 경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첫 번째 여인은 다말이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다말은 유다의 아내가 아니라 며느리였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런 다말이 메시야의 족보에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두 번째 여인은 라합이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았고” 라합은 여리고성의 기생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매춘부였다. 이방 땅 매춘부가 예수님의 족보에 실려 있다.

세 번째 여인은 당시 이스라엘로부터 개처럼 취급받던 이방 모압 여인이었고, 네 번째 여인은 우리야의 아내이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다윗이 아들을 낳으려면 다윗의 아내에게서 낳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 이런 일이 어찌 메시야의 족보에 기록될 수 있을까?

구약에 얼마든지 훌륭한 여인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빠지고 상처투성이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비밀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들의 모든 죄와 허물, 실수와 수치스런 과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허물어지고 용서 받았다.

예수님 안에서 다말, 라합, 룻 그리고 밧세바 같은 우리의 상처와 부끄러움이 다 용서받고 메시야의 족보, 구원계보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이 족보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무너지고 남자와 여자의 장벽이 무너진다. 이 족보 안에서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어 지고, 수치가 영광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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