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광 칼럼위원

부마(駙馬)는 ‘부마도위’의 줄인 말로 말을 관리하는 중국의 관직 이름이다. 말을 관리하는 일은 요직이라 관례적으로 황제의 사위가 맡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아예 황제의 사위를 일컫는 칭호가 되었다.

일반 여염집에서도 사위라면 씨암탉도 마다않고 삶아주는 백년지객(百年之客)인데 왕의 사위라면 그 영광이야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 아니었겠는가?

왕의 사위가 되면 존칭부터 달라진다. 아내가 공주면 종1품을, 옹주면 종2품의 품계를 받고, 본향 다음에 ‘위(尉)’라는 관작을 붙여준다. 이를테면 본향이 김해면 ‘김해위’고, 밀양이면 ‘밀양위’다.

공주는 50간, 옹주는 40간의 집을 지을 수 있고, 토지는 공주 850결, 옹주는 800결을 지급 받는다. 부마가 되면 평생 먹고 사는 데는 걱정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조선의 남자들이 임금의 사위에 큰 매력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왕의 딸은 그 지위가 남편보다 높기 때문에 아내를 평생 상전으로 모시고 살아야만 했다. 또한 부마는 간택에 의해 뽑혔으니 왕녀들이 시가나 남편에게 교만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왕의 핏줄인 아내를 홀대했다가는 처벌까지 감수해야 했다.

부마가 되면 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고, 다만 왕실의 예식이나 외교적인 행사에 참석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있으면서도 없는 듯 사는 게 부마의 가장 큰 미덕이었으니, 왕의 딸을 신붓감으로 맞이한다는 것은 곧 남자로서의 자존심과 권력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부마로 살아가려면 포기해야할 또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첩이다. 양반가의 남자들과는 달리 부마는 첩을 두지 못하게 법으로 제한해 놓았다. 왕의 딸인 아내가 죽고 나면 부마는 재혼도 할 수 없었다. 부마에게 채워진 이런 족쇄 때문에 조선의 남자들은 부마자리를 기피했다. 왕의 딸은 조선시대 남자들에게는 인기 없는 최악의 신붓감이었던 것이다.

북한 김씨 왕조의 부마로 정권의 2인자까지 올랐던 장성택이 만고의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고 말았다. 이는 조선의 부마학을 일찍 깨닫지 못한 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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