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철봉 칼럼위원

▲ 문철봉 거제YMCA 사무총장
어릴 때 동무들과 절교한 적이 있다. 동무들이 욕을 입에 달고 있어서 어울리기가 민망하다는 이유였다.

예를 들면 이랬다. “야, ㅆㅂ넘아 밥 뭇나?” “용만아, 학교가자, ㅆㅅ끼야!” “이거 무바라. ㅈ나게 맛있다!” “ㅈ만한 ㅆ끼야 빨이 온나.” 등이다. 말 한 줄에 욕 한 두 개가 들어가지 않으면 아예 말이 되지를 않았다.

전학을 와서 마주친 낯선 환경이기도 했지만 어린생각에도 이건 아니다 싶어 동네에서 등하교를 같이하는 중 1학년의 동무 예닐곱 명을 불러 놓고 결단을 했다.

“상대가 내게 잘 못해서 성질이 났을 때 하면 모를까 어찌 인사하는 것도 욕으로 하냐?”고. “초등학생도 아니고 이제 중학생이니 욕을 쓰지 말고 바른말로 하자.” 했다. “세 번의... 기회를 줄 테니까 노력해서 고치자. 만약 그렇지 않으면 동무하지 않겠다”고 했다. 동무들이 얼굴이 벌게져서 동의한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 동무도 이 순정한 권유를 받아 내지를 못했고 난 말한 대로 스스로가 외톨이가 된 기억이다.

근래 H신문에, 어느 50대가 식당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옆자리에 앉았던 20대 아가씨들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아달라는 항의성 요청을 받았고 아저씨는 이를 순순히 받기는커녕 쌍욕으로 되받아 쳤다고 한다.

결과는 야무진 아가씨들이 이 장면들을 동영상으로 담아 그대로 경찰에 신고했고 버티던 아저씨는 증거자료들에 의해 결국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다시는 젊은 여성에게 욕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와 합의서를 쓰고 방면 되었다는 기사를 본다.

우리말에 ‘욕먹어도 싸다.’가 있다. 분명 잘못한 상대가 있어 누가 봐도 욕먹을 짓을 했기에 당해도 당연하다는 말이다. 앞 예의 아저씨가 그렇다. 어릴 적 동무들의 욕 버릇은 나쁜 뜻이나 의도를 담지 않은, 내용도 없이 친밀감을 타나내고자하는 또래문화의 하나라 웃고 넘길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욕들이 얼마나 나쁜 말인지를 모른 채 막무가내로 쓰는데 있다. 요즘 아이들은 저런 쌍욕에 더하여 저들만의 비속어들을 만들어서 쓴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이들과 얘기하는 말끝에 “헐~”하고 반응 한다. 그 말이 뭐냐고 하니 또 “헐~” 한다. 이렇다, 마치 외계어를 듣는 듯하다.

무엇이 잘 못 되었고 어디가 꼬였을까? 이 반문을 하고 보니 엉뚱하게도 내속에서 욕으로 풀어버리고 싶어 하는 카타르시스가 머리를 내민다. 욕먹을 사람이 아닌 데에다 욕을 하는 것은 아니 되지만 버젓이 욕먹을 짓을 하고 있는데도 욕을 못하는 갑갑함이다. 갑갑함만이 아닌 큰 스트레스다.

누구 특정한 사람도 있지만 지금의 세태가 더 그렇다. 하고도 안했다하고 당연히 사과할 것도 안하고 다른 괴변만 늘어놓는다.

오히려 더 큰소리고 뻔뻔하다. 공공의 개발지 정보를 빼내어 알박이하고선 “결국 내가 양보했다”는 졸부가 판을 치고, 가여운 과부노인네의 배내기 땅을 빼앗아 대신 보상받아 먹고선 나 몰라 하면서 교회에선 경건한척 고개 쳐들고 있는 장로, 불쌍한 이를 도와야한다며 시주와 적선을 설법하고는 최고급 승용차타고 나와 개고기 뜯는 주지, 교회 지을 터라하고선 용지개발해서 일반택지로 되 팔아먹는 목사, 동족을 해친 친일보다 반공이 더 나은 일이라며 세워지는 동상.... 어찌 이것뿐일까?

아이들 눈으로 봐도 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가고 있는데, “거꾸로” 라고 말하면 오히려 “빨갛다”고 한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말했다고 두들겨 잡는다. 지금까지 합리와 객관의 두 눈 보기를 애써 왔고 그렇게 습관 들어간다 했는데 한순간에 합리가 아닌 일획의 집단으로, 객관이 아닌 외통으로 한순간에 외눈박이 세상이 되는 듯하다.

정말 욕 나온다. 하지만 정말 하고 싶지 않다. 욕의 속성은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꼬집어 말하는 것, 즉 상대의 부모나 조상을 비하하는 것과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을 나타내어 조롱하는 것이다. 다른 문화권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팔뚝 욕을 하는 것이나 서양 사람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것이 그러하다. 이 사람들이 가장 큰 욕이라고 하는 무닝(Mooning)은 바지를 벗어 볼기를 드러내는 것인데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선 본인의 수치와 부끄러움도 감내하고 해야 한다. 이것은 스스로의 부끄러움보다 상대의 멸시와 조롱이 더 크다고 인식하기에 가능하다. 말하자면 막가는 인생이라고 느끼기에,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라고 생각하기에 할 수 있는 짓거리인 것이다.

누군들 처음부터 이러고 싶을까. 아니다, 참지 못해서 참을 수 없어서 하게 된다. 욕의 카타르시스는 이렇게 해서 빠져들게 되고 나중엔 스스로도 수치고 욕된 줄을 모른 채 욕하는 행위 자체로 희열을 가지게 된다. 욕의 카타르시스는 도취 속의 정화가 아닌 오염되는 것의 도취이다. 이런데 어찌 이 카타르시스를 욕구한다는 말인가.

양보와 배려를 사람이 아름답게 살아가는 근간의 양식이라 여긴다. 법과 원칙, 정의와 평등이 살아 있는 사회라 믿기 때문이다. 헌데 요즈음은 이 말들이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아니었으면 한다. 이성과 양식, 지성의 사람들까지 욕지거리를 입에 달고 나서는 세상,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제발 욕 좀 안하고 살자. 상대를 힐난하고 욕하는 손가락질이면 상대에겐 하나지만 나머지 셋은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을 알지 않는가.

‘욕먹어 싼’ 사람이 적은 세상, 어쩌다 ‘욕먹어 싼’ 사람이 되더라도 곧 바로 자신을 돌아보아 사과하고 공동체로 회복되는 세상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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