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창수 칼럼위원

▲ 천창수 송진교회 목사
나이 50줄에 들어서야 예수를 알게 된 한 청소부가 있었다. 그는 그 나이가 될 때까지 교회 문턱도 밟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녔고, 고교 시절에는 학생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런 자랑스러운 아들이 반듯하게 자라가는 것을 보는 재미에 하루 종일 쓰레기와 씨름하면서도 고달픈 줄을 몰랐다. 가진 것은 없어도 남부러울 것 없는 팔자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 아들이 간간이 들려주던 예수님 이야기, 그러나 그는 그 얘기가 배부르고 등 따신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긴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던 아들이 과속 트럭에 치어 즉사하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아들이 대문을 벌컥 열어 제치며, "아버지, 학교 다녀왔습니다"하고 인사할 것만 같았다.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는 날들이 흘러갔다. 그 다음에는 술로 자신을 달래보려 했다. '그렇게 성실하게 교회를 위해 봉사했는데···, 우리 아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생떼 같은 아들 대신 차라리 이 늙은이를 데려갈 일이지···.'

아들을 죽게 내버려 둔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미웠다. 그래서 그는 하늘에 대고 악을 쓰며 삿대질을 했다.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무심하기만 했다. 그는 목사를 찾아가 멱살을 잡고 갖은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러나 아무리 발악을 해도 그의 마음 속 깊이 가라앉아 버린 분노와 억울함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얼마동안 아우성을 치던 그는 마침내 목사를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 그는 결국 실신을 하고 말았다. 목사는 앙상하게 뼈만 남은 그를 안방에 데려다 눕혔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주일예배 시간에 설교를 하던 목사는 뒷자리에서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는 소년의 아버지를 발견했다. 예배가 끝나고 그 아버지는 목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들이 믿었던 예수를 지가 대신 믿어 볼랍니다."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아들이 떠난 지 수년이 지나고, 소년의 아버지는 무척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좋은 예수님을 아들이 살았을 때 믿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그러면서 어깨를 들썩이며 찬송을 부른다.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세상에 어떤 것도 비길 수 없네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새 지평이 열린다. 고난과 절망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만나면 새 삶이 시작된다.

사업이 망하면 자살을 하는 사람이 있다. 때로는 식구들까지 다 데리고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축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 고난은 최고의 복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삶에는 '패배한 삶'이란 없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언제나 새로운 인생이기 때문이다.

고난중에 있는 사람은 팔자소관을 탓하고 자신의 박복함을 탄식하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난 감격으로 언제나 감사하는 지혜를 보여준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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